오타키 에이이치, 오타키 에이이치(오오타키 에이이치, 본명:오오타키 에이이치, 1948년〈쇼와 23년〉7월 28일 - 2013년〈헤이세이 25년〉12월 30일[1][2][3][4])는, 일본의 뮤지션이다.
오타키 에이이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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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오타키 에이이치 |
별칭 | 별칭 참조 |
출생 | 1948년7월 28일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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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3년12월 30일(65세 사망)[1][2][3][4] |
학력 |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 중퇴[5] |
장르 | |
직업 | |
담당 악기 | |
활동 기간 | 1969년 - 2013년 |
레이블 | |
소속사 | 더 나이아가라 엔터프라이즈 |
공동 작업자 | 핫피 엔도(1969년 - 1972년) |
공식 웹사이트 | 오타키 에이이치 아미고 가라지 |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편곡가, 음악 프로듀서, 레코드 레이블 오너, 라디오 DJ, 오디오 엔지니어, 마스터링 엔지니어, 저술가, 전 Oo Records 이사 등, 여러 얼굴을 가졌다.
이와테현에사시군야나가와무라(후의 에사시시, 현재의 오슈시) 출생. 모자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머니가 공립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각각 전학을 경험했다(초등학생 시절에는 에사시에서 토노로, 중학생 시절에는 토노에서 가마이시로).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친척 집에서 들은 카니 프랜시스의 "립스틱 온 유어 칼라"(Lipstick On Your Collar)에 충격을 받은 이후로 미국 팝스에 심취했다. 중학교 입학 후 라디오 동아리에 들어가 라디오를 직접 만들어 미군 원정 방송(FEN)이나 닛폰 방송의 프로그램을 듣게 된다. 곧 축음기 음반 수집을 시작하여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치 보이스 등의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기 시작하며 독자적인 연구를 심화시킨다.
그 때문에 1962년 여름부터 1966년까지 차트인한 곡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정통했다[주 1]. 같은 시기에 고바야시 아키라나 미하시 미치야 등의 음악도 즐겨 들었다. 특히 크레이지 캐츠의 우에키 에츠가 부른 "스다라 부시"에는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64년, 이와테현 하나마키키타 고등학교에 입학. 하숙 생활을 하지만, 학비를 모두 축음기 음반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학비 미납으로 1년 만에 제적되고 이와테현 가마이시미나미 고등학교(현: 이와테현 가마이시 고등학교)에 편입한다. 입학 직전, FEN에서 비틀즈를 알게 되고, 이후 리버풀 사운드 전반을 싹쓸이하듯 구입했다. 가마이시미나미 고등학교 편입 후 처음으로 밴드를 결성한다. "스플렌더즈"라는 밴드에서 드럼을 담당했다. 원래는 코믹 밴드를 하고 싶었지만 동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비틀즈 스타일의 밴드를 결성했다. 멤버 중에는 현재 가마이시시에 있는 철의 역사관 관장을 맡고 있는 사사키 유가 있었다.
1967년에 상경, 고이와의 제철 회사에 취직하지만, 출근 약 20일, 재직 기간 3개월 만에 퇴사한다. 그 며칠 전, 후나바시 헬스센터에서 회사 송년회가 있었는데, 여흥으로 비틀즈의 "걸"을 아카펠라로 불렀더니 상사로부터 "음, 너는 이런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충고받았다고 한다[9]. 같은 해 여름, 후타야 후미오와 만나 "타부"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드럼을 담당했지만, 같은 해 연말에 해산한다.
1968년 와세다 대학 제2문학부에 입학[5]했다. 후타야를 통해 교류가 있던 나카타 요시히코[주 2]로부터 호소노 하루오미를 소개받아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오타키가 호소노의 집에 초대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호소노가 '기량 시험' 삼아 영 브래드스의 「겟 투게더」(싱글반)를 보이도록 놓아두었다. 방에 들어선 오타키가 그것을 눈치채고 "어, 겟 투게더"라고 말해 호소노를 감탄시켰다. 이후 오타키, 나카타, 호소노 셋이서 정기적으로 팝스 연구회를 열었다. 1969년, 호소노가 참가하고 있던 밴드 「에이프릴 풀」 해산 직전에, 호소노와 마츠모토 타카시에 의해 계획되었던 새로운 밴드에 가입을 요청받아 수락했다.
「발렌타인 블루」는 이듬해 1970년 「핫피 엔도」로 개명하고, 앨범 『핫피 엔도』로 데뷔했다. 이 시기, 신주쿠 플레이맵에서의 종합토론회(일본어 록 논쟁)에 참가했다.
핫피 엔도 활동 중이던 1971년에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앨범 『오타키 에이이치』( 1972년)을 발표했다. 핫피 엔도 해산 후에는 솔로 활동으로 이행하지 않고, 당시 싱어송라이터로서는 이례적인 CM송 제작과, 고마노하에, 후타야 후미오 등 젊은 작가들의 프로듀스를 시작했다.
이 무렵, 1972년 발매된 야마시타 타츠로의 자주 제작 앨범 『ADD SOME MUSIC TO YOUR DAY』를 우연히 들은 이토 긴지가 오타키의 집에 『ADD SOME MUSIC TO YOUR DAY』를 가지고 와, 앨범을 듣고 야마시타의 보컬을 들은 오타키는 앨범에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었기에 연락을 취해 야마시타를 자택으로 초대했다. 미국의 팝스를 좋아한다는 공통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의기투합하여, "핫피 엔도의 해산 콘서트에서 코러스를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한 것이 야마시타가 프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토 긴지가 야마시타의 자주 제작 앨범을 오타키의 집에 가져온 것이 계기였지만, 최종적으로 야마시타 타츠로의 프로 데뷔 계기는 오타키와의 만남이었기에 야마시타 타츠로를 발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야마시타와의 교류는 오타키가 타계한 2013년까지 계속되었다.
1974년 9월에는 자신이 작사·작곡·편곡·프로듀스·엔지니어·원반 제작·원반 관리 등을 모두 담당하는 프라이빗 레이블 「나이아가라 레이블」을 설립하고, 엘렉 레코드와 계약했다. 이듬해 1975년에는 핫피 엔도 해산 후 처음으로 솔로 앨범 『NIAGARA MOON』을 발표했다. 또한, 라디오 간토(현재의 RF라디오닛폰)에서 DJ를 맡은 프로그램 『고고 나이아가라』를 시작하여, 학생층의 충실한 팬을 확보하는 등, 활발하게 솔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 직후 엘렉 레코드가 사업 축소를 하여 계약이 해지되었다.
1976년, 일본 컬럼비아로 나이아가라 레이블을 통째로 이적했다. 그때의 계약은 후생 45 스튜디오에 당시 최첨단 16채널 멀티트랙 레코더를 제공받는 대신, 3년 동안 앨범 12장을 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에 "3년 동안 어디에도 나가지 않고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있었다", "3년 동안의 격무는 후에부키 도우지(엔지니어로서의 별명)의 엔지니어였고, 노래를 만들거나 가사를 쓰는 것은 잘하지만 엔지니어는 아마추어였으니까"라며 컬럼비아 소속으로 맺었던 힘든 계약 3년을 회고하고 있다. 『NIAGARA TRIANGLE Vol.1』『GO! GO! NIAGARA』『NIAGARA CM SPECIAL Vol.1』은 히트를 기록[10]했지만, 취미성이 너무 강한 곡이 화근이 되어 이후 작품의 완성도와는 반대로 매출이 부진했다. 1977년의 『NIAGARA CALENDAR』는 차트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1978년의 『LET'S ONDO AGAIN』을 마지막으로 컬럼비아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후생 45 스튜디오의 기재도 매각했다. 나이아가라 레코드도 휴업 상태에 빠졌다. 이후 레코드 판매권 계약이 남아 있는 2년 동안 솔로 작품을 발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이 해에는 앨범을 3작품밖에 만들지 않았는데, 원래라면 한 장 더 만들어야 하는 계약이었기에 자체 규제였고, 1980년에 컬럼비아 주도로 『TATSURO YAMASHITA FROM NIAGARA』가 발매되었을 때는 안도했다고 한다.
1979년부터 프로듀스업을 맡아, 이듬해 1980년에 프로듀스 일로 자주 드나들었던 CBS·소니로 이적했다. 옛 친구인 마츠모토 타카시와 팀을 이루어, 나이아가라 사운드의 집대성이 될 작품의 레코딩에 착수했다. 이 레코딩 도중에, 여성 취향이라고 생각한 「사라바 시베리아 철도」를 오타 유미에게 제공했다. 이 곡은 오타키의 곡으로는 처음으로 히트 싱글이 되었다.
1981년 3월에 『A LONG VACATION』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매출이 부진했지만[11], 점차 판매량이 늘어나(오타키 말에 따르면 "엔카 같은 판매 방식") 여름에는 차트 2위를 기록했다. 「제23회 일본 레코드 대상·베스트 앨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7월에 발매된 사이조 히데키의 앨범 「팝핑걸 히데키」에 수록된 「스포츠 걸」「론섬 시티」를 제공했다.(작사는 마츠모토 타카시) 1983년까지 활발하게 곡 제공·프로듀스를 계속하여, 마츠모토와 콤비로 마츠다 세이코의 싱글 『바람이 일어난다』로 처음으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우나즈키 트리오의 싱글 「우나즈키 마치」에서는 오타키 작사 작곡으로 처음으로 차트에 진입하는 등, 많은 아이돌송·노블티 송을 맡아 일약 명성을 얻었다. 모리 신이치의 『겨울의 리비에라』에서는 가요쿄쿠의 왕도 노선 가수의 폭을 넓히는 팝스 곡을 제공하여 가수의 새로운 측면을 개척했다.
1984년의 앨범 『EACH TIME』 제작 시에, 소위 "곡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 빠진 것과, 독자적인 팝스 음악의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오리지널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나가는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오타키는 이 앨범을 가지고 음악 제작 활동의 휴지 결단을 내렸다. 1985년 6월의 핫피 엔도 재결성 라이브가 마지막 라이브 출연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싱글 컷한 「피오르드의 소녀」를 마지막으로 1997년까지 신보 발표는 중단되었다.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로서 80년대 후반에도 계속 활동했으며, 1985년에는 스스로 열렬한 팬이라고 공언한 고바야시 아키라의 「열정적인 마음」에서는 팝스 정통 음악을 제공하여, 오랜 팬들에게는 옛날 마이 갓의 활약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또 고바야시의 젊은 시절 은막의 대스타로서의 인기를 모르는 젊은 팬들에게도 고바야시라는 존재를 알렸다. 이듬해에는 소년 시절부터 팬이었던 크레이지 캐츠의 30주년 기념 작품을 제작하여 신곡 「실년 행진곡」을 작곡·편곡하고, 고만세츠의 리메이크 「신 고만세츠」를 편곡(크레딧에서는 편편곡)했다. 크레이지 캐츠의 음악을 많이 제작한 하기와라 테츠아키의 애호가이기도 한 오타키는 하기와라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의 이름을 「원편곡」으로 크레딧에 표기하고, 「실년 행진곡」과 「신 고만세츠」에 과거 음악의 프레이즈를 삽입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나이아가라 레코드의 구음반 리마스터링이나, 오타키가 영향을 받은 선배들의 음원 복각 「LEGENDARY REMASTER SERIES」의 감수 및 라이너 노트 집필, 라디오 특별 프로그램의 DJ 등을 맡았다. 또한,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팝스사 연구는 1983년에 「분모 분자론」으로 그 일부가 밝혀졌지만, 1991년에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보통설」로 결실을 맺었다.
1988년에 코이즈미 쿄코에게 제공한 『쾌도 루비』 이후 작곡에서 멀어졌지만, 1994년부터 소니 레코드의 Oo Records에 이사 겸 프로듀서로 참가했다. 이듬해, 사쿠라 모모코의 의뢰로 『마루코는 아홉살』의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작곡했다. 와타나베 마리나의 『즐거운 예감』으로 7년 만에 작곡가로 복귀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12년 만의 신곡 『행복한 결말』을 발표했다. 월 9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의 주제가로 제작된 이 곡은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당시 『오타키 에이이치의 올나이트 닛폰 DX』에서 1985년부터 12년간에 대해 「은퇴했다」고 말했다. 자주 음악 제공이나 프로듀스 업무는 했으므로, 가수로서는 은퇴했다는 말이 된다. 『행복한 결말』에 이어, 이치카와 미와코의 싱글 「팝스타」의 프로듀스도 맡았다.
2000년대에 들어 다시 구음반 리마스터링, 음원 복각 감수를 재개했다. 또 옛날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리마스터하여 재방송하거나, 옛날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 시리즈를 시작하는 등, 독자적인 시도를 하게 되었다.
2003년에는 6년 만의 싱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발표했다. 월 9 드라마 『도쿄 러브 시네마』 주제가로 히트했다. 또, 타케우치 마리야의 앨범 『Longtime Favorites』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 낸시 시나트라의 「Something Stupid」(恋のひとこと)를 이중주했다. 이것들이 마지막 작품 발표가 되었다.
2004년 말에는 자택에 마스터링용 기재를 도입하여, 후사 45 스튜디오가 부활했다. 2005년부터 마지막 리마스터로서 나이아가라 구음반의 30주년 애니버서리반 발표를 순차적으로 시작했다. 2014년 3월에는 최종작 「EACH TIME」의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또 라디오 『오타키 에이이치의 아메리칸 팝스 전』도 절정에 달하고 있으며, 2014년 봄 또는 여름에 완결되고, 본명인 영국의 팝스 전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2005년, 톤네루즈의 신곡 기획이 시작되어, 작사에 이토이 시게사토를 기용한 『저녁 친구 (USEFUL SONG)』가 제작되었지만, 톤네루즈 측이 희망했던 이미지와 달랐기 때문에 미발표가 되었다[12]. 이 곡 제작에 임하여, 2005년12월 12일에 본인에 의한 노래도 녹음되었으며, 이것이 오타키의 마지막 공식 노래 레코딩 음원이 되었다[13].
2011년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진재 후에는, 고향의 동급생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등, 재해를 당한 고향에 마음을 계속 쏟았고, 피해를 입은 동급생에게 사인을 한 자신의 CD를 선물했다.
2013년12월 30일 17시 50분경[14], 도쿄도니시타마군미즈호정의 자택에서 가족과 저녁 식사 후 디저트로 사과를 먹고 있다가 쓰러져, 구급차로 이송되었다. 경시청 후사 경찰서 등에 따르면, 가족은 「사과를 먹고 있다가 목에 걸렸다」고 설명했다고 한다[15].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폐정지 상태였으며, 병원으로 이송 후 19시경 사망이 확인되었다[1][2][3][4]. 사인은 박리성 동맥류로 밝혀졌다(보도에서는 발병 부위 등 자세한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다)[1][2][3][4]. 향년 65세.
갑작스러운 비보는 음악 관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사노 모토하루[16], 야마시타 타츠로[17], 오오누키 타에코, 요시다 미나코[18], 쿠와노 노부요시 등이 애도의 메시지를 발표했다[19]. 또 오랜 벗이었던 마츠모토 타카시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12월의 여행자여」라고 오타키의 곡 「사라바 시베리아 철도」에 빗댄 애도의 글을 올렸다[20].
2014년1월 4일, 도쿄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약 100명의 관계자가 참석했다. 식장에는 미발표곡인 그의 목소리로 부른 "꿈에서 만나면"이 흘러나왔고, 관은 핫피 엔도 멤버였던 마츠모토 타카시, 스즈키 시게루, 호소노 하루오미 등 3명이 운구했다[21]. 또한 많은 스태프와 관계자들의 요청에 따라, "3월 21일" "A LONG VACATION" 발매일이자 마지막 앨범 "EACH TIME 30th Anniversary Edition" 발매일이기도 한 날에 "추모회"가 거행되었고, 일반 참석자를 위한 조화대도 마련되었다[22][23].
3월 21일 "EACH TIME" 발매를 앞두고, 3월 19일부터 과거 음원의 아이튠즈 스토어 일제 배포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워진 시리아 폴의 "꿈에서 만나면" 커버곡과 단독 CD로 발매되지 않았던 "DEBUT", 30주년 재발매에서 제외되었던 "LET'S ONDO AGAIN" 등 귀중한 음원도 포함되어 있다. 단, 기념 CD 발매 당시 보너스 트랙들은 제외되었고, 오리지널 수록곡만 포함되어 있다[24].
추모회 자리에서, 아내가 그의 마지막 말이 "엄마 고마워"였다고 밝히며, 바로 의식을 잃고 청색증 증상까지 보였다고 한다. 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심장 마사지를 계속했지만 (아내는 간호사였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했다는 임종 상황이 밝혀졌다[25]. 이어서 "당일 대화는 20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화의 모든 것이 유언이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라면 12월 말은 좋아하는 낙화를 듣고, 스튜디오 정리,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있었을 텐데, 작년에는 없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고맙다'라고 말해준 것은, 지금까지 남편을 지지하고 지켜봐 주신 여러분, 그리고 팬 여러분께 제가 한마디 감사 인사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했습니다"라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26].
사후 약 1년이 지난 2014년12월 3일에는 생전에 야마시타 타츠로에게 구상을 이야기했던 올타임 베스트 앨범 『Best Always』가 발매되었다. 여기에는 그가 비밀리에 녹음했던 "꿈에서 만나면"의 셀프 커버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노래를 담은 "신곡"이 발매된 것은 무려 11년 만이었다. 또한 발매가 기대되었던 『Niagara CD Book II』도 늦어져 2015년3월 21일에 발매되었다[27].
2020년10월 1일부터는 고향 근처 동일본여객철도(JR 동일본) 도호쿠 신칸센 미즈사와에사시역에서 "君は天然色"을 어레인지한 버전이 발차 멜로디로 사용되고 있다[28][29].
2021년3월 21일, 나이아가라 레이블에서의 솔로 명의 전곡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를 해금했다[30]. 또한 유튜브에서는 "君は天然色"의 뮤직 비디오가 3월 3일 12시에 공개되었다. 이것은 "A LONG VACATION" 발매 4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그의 첫 MV 작품이다. 앨범 재킷을 담당했던 나가이 히로시의 일러스트가 입체적으로 표현된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작은 그의 열렬한 팬인 애니메이션 영상 감독 이다 노부타카가 맡았다.
2023년10월 25일에 발매된 마츠다 세이코의 베스트 앨범 『Bible -milky blue-』에 "風立ちぬ (duet version)"이 수록되었다. 이 음원은 1981년 마츠다 세이코가 해당 곡을 녹음할 당시 함께 했던 그가 장난 삼아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와 자신의 노래를 잇는 편집을 통해 이중주 곡으로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음원이었지만, 그의 사후 10주년이라는 시점에 공개되었다[31][32].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의 팝스 록, 영국의 리버풀 사운드, 일본의 가요쿄쿠 및 연예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활용하여 제작되는 음악 트랙은 평범하게 들리지만 분석해보면 매우 매니악하고, 또한 직접 작사한 부분에는 독특한 유머가 들어 있다. 『고고 나이아가라』 시절에 리스너로부터 "당신에게는 고민이라는 것이 없습니까?"라는 투고가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작품은 크게 멜로디 타입이라고 불리는 노래 중심의 곡과 노벨티 타입이라고 불리는 사운드 중심의 곡의 두 가지로 나뉜다.
곡 제작의 정밀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저 곡은 세 곡의 표절이네요"라고 지적하며 물었더니, "그 세 곡과, 또 두 곡, 다섯 곡으로 만들어졌는데, 너는 세 곡밖에 몰랐구나"라고 대답했다는 일화(야마시타 타츠로가 라디오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나 이토 긴지가 녹음에 참여했을 때, 유명 곡의 프레이즈를 음표를 거꾸로 연주하도록 강요받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경위로 "시부야계처럼 과거 작품의 좋은 부분을 조금씩 따와서 곡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결국에는 +α의 영감이 없으면 곡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며, 『EACH TIME』 녹음 시기에는 이미 그 영감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발언에도 독특한 농담이 많이 들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난치는 것 같으면서도 진지하거나,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장난스러운 발언을 덤덤하게 하는 타입의 인물이었고, 단순히 발언을 녹취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특히 유명한 것이 "2001년 나이아가라의 여행"에 얽힌 것으로, 1984년 "뮤직 스테디"의 오타키 에이이치 특집에서 "1988년에 '나이아가라 트라이앵글 Vol.3', 1989년에 '나이아가라 캘린더 '89(복각판)', 1991년에는 솔로로 신작 '1991'로 레코드 번호도 1991을 예약. 1994년에는 '나이아가라 트라이앵글 Vol.4', 2000년에 '나이아가라 트라이앵글 Vol.5', 2001년에 다시 솔로 신작으로 '2001년 나이아가라의 여행'을 발표, 이상을 예정하고 있다"는 발언. 이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울었던 팬은 많다. 1990년대까지 비슷한 발언을 반복했지만, 오타키 에이이치에게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고, 야마시타 타츠로 등에게 추궁당하면 "예정은 미정이니까", "그보다 네 작품은 어떻게 됐어?"라며 얼버무리거나, 신곡이라고 하면서 드럼 카운트 부분만 녹음한 것을 방송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제공한 곡의 셀프 커버를 발표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있는지 없는지 질문받아도, 없다고 잘 얼버무렸다. 또, 발표하더라도 가사를 개작하거나 새로운 멜로디를 추가하여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제공한 곡으로 제작된 것에 한정하면, 가사의 개작을 하지 않은 셀프 커버는, 사와다 켄지의 "저 아가씨 조심하세요"뿐이었고, 셀프 커버를 만든 이유도 "곡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본의 아니게 한 것이었다.
그 외에는 슬랩스틱의 "덱 체어"를 가사를 새롭게 마츠모토 타카시에게 의뢰하여 "스피치 발룬"으로, "해변의 줄리엣"은 가사를 새롭게 마츠모토 타카시에게 의뢰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후렴 부분의 파트를 만들어 "사랑하는 카렌"으로 셀프 커버하고 있다.
"사라바 시베리아 철도"는 자신의 곡으로 제작 중에 오타 유미에게 제공할 생각이 떠올라 그것을 실행한 것으로, 2015년 3월 29일에 NHK BS 프리미엄에서 방송된 "오타키 에이이치 송북"에서 오타 유미가, 앨범 녹음 중에 디렉터가 같았던(시라카와 류조) 탓에, 같은 시기에 같은 스튜디오의 다른 부스에서 녹음 중이던 오타키 에이이치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 "오타 유미에게 좋을 것 같은 곡이 있다"고 말해 제공받았다고 "사라바 시베리아 철도" 제공의 경위를 말하고 있다. 우연히도 "목면의 손수건"과 같은 마츠모토 타카시 작사로 여성 가사와 남성 가사가 번갈아 나오는 구성의 가사였다.
"Bachelor Girl"은 일단 자신의 녹음이 완성되었지만 가사 내용에 대한 의문 때문에 발표를 보류하고, 의문점이 해결된 후에 이나가키 준이치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의 버전이 셀프 커버로 발표된 경위가 있다.
"꿈에서 만나면"은 생전, 셀프 커버의 마스터 테이프의 존재는 가족에게만 알리고 있었고, 사후, 관계자가 스튜디오 정리를 하는 중에, 본인이 없다고 말했던 셀프 커버의 테이프가 잇따라 발견되어 CD화되고 있다.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작품을 특집으로 할 경우에는 "가타인수 쿤에게 부탁한다"는 식으로 별명을 사용하여 오타키 에이이치로서 직접 자신의 작품을 다루지 않는 연출을 하고 있었다.
마츠토야 마사타카에 의하면, 이마다 고지를 1000배 어둡게 한 것이 오타키 에이이치라고 한다(" FUN"보다).
데모 버전은 가사가 먼저 나온 곡의 데모는 제공받은 가사를 부르지만, 곡이 먼저 나온 작품은 거의 가사를 붙이지 않고 콧노래로 멜로디를 불러 제출하고 있다. 『A LONG VACATION 40th Anniversary Edition』의 Disc-2의 『Road to A LONG VACATION』에서 1978년부터 3년간에 발표한 곡의 데모 버전이 각각 일부 수록되어 들을 수 있다. 오타키 에이이치에 의하면 "데모를 확실히 만들면 본방이 망한다", "그 형태에 갇히게 된다"고 하여 콧노래(본인에 의하면 흐느적거리는) 멜로디의 데모를 제작한다. 참고로, 『A LONG VACATION』수록곡 "Velvet Motel"은 처음에는 "Summer Breeze"라는 제목으로 안 루이스에게 쓴 곡으로, "A LONG VACATION 40th Anniversary Edition"의 Disc-2의 『Road to A LONG VACATION』에서 가사가 임시 가사였는지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가사였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오타키 에이이치에 의한 가사가 붙어있는 데모 테이프의 일부가 공개되었다.
독특한 장난기는 수많은 가명에도 반영되어 있다.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첼시"로, 오타키 에이이치가 포크 시대의 호소노 하루오미와 함께 "호소노 하루오미+α" 명의로 무대에 올랐을 때, 조니 미첼의 "첼시의 아침 (Chelsea Morning)"을 불렀는데, 관객 속에 있던 "존 세바스찬과 포크록을 지키는 모임"의 멤버로부터 "첼시"라고 불리게 된 것이 계기이다.
핫피 엔도 시대를 포함하여, 레코드 회사는 인디즈 계열의 URC(언더그라운드 레코드 클럽) → 벨우드 레코드(킹레코드(일본)) → 엘렉 레코드를 거쳐 일본 컬럼비아로 이적하지만, 벨우드 레코드 다음에는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의 이적을 생각하고 있었다[33]. 거기서 도시바 EMI, CBS 소니, 일본 컬럼비아에 문의했지만, CM송 앨범은 낼 수 없다는 거절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엘렉 레코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발매된 레코드에 엘렉의 마크가 붙은 것도, "정말 싫었어요. 앞면 뒷면 모두 넣었을 때, 그렇게 싫은 일은 없었어요. 더 이상 그 글자는 피하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어요. URC 시절에는 아직 레코드 회사를 몰랐고, 처음으로 레코드가 나온 곳이니까요. 레코드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했지만, 뭐, 엘렉은 정말 가고 싶지 않은 회사였어요. 솔직히 말해서(웃음)"라고 말하고 있다[33].
솔로가 된 이후, 노벨티 타입의 음악을 제작하는 가운데 많은 리듬을 도입했다. 특히 메렝게(도미니카 공화국의 댄스 음악)(영어판)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으로, 몇 번이나 곡명에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뉴올리언스의 검보 음악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상당히 빠른 시기에 주목했다. 호소노 하루오미에게 권해서 호소노의 커리어에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일본의 댄스 음악이라면 민요일 것이다라는 생각에 이르러, 민요를 적극적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이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고, 계기는 1973년에 이토 긴지로부터 추천받은 나카하라 유미히코(고바야시 노부히코)의 「일본의 희극인」을 읽고, 일본의 희극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그 후, 오타키는 「고고 나이아가라」시대에 사무실에 모이는 나이아가라 매니아 젊은이들에게 같은 책을 필독서로 권하고 있었다. 그 영향도 있어, "민요를 만들어 보면 어떻겠습니까?"라는 편지가 라디오로 보내지게 되어, 이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겼다.
그 후에도 꾸준히 민요를 제작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나이아가라 민요"(앨범 「NIAGARA TRIANGLE Vol.1」수록), "크리스마스 민요"(앨범 「NIAGARA CALENDAR」수록), "빅커리 하우스 민요", 카타오카 츠루타로의 「스릴러 민요」와 「비트잇 민요」및 스미카와 히로시의 "토끼 온천 민요", 더 나아가 가나자와 아키코의 "옐로우 서브마린 민요"(편곡: 하기와라 테츠아키)의 프로듀스 등이 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는 오디오 엔지니어, 믹서 후에후키 도우지로서도 활동했다. 이름은 요시노 킨지, 이토 긴지에 이어 다음은 "도우지"라는 것으로, 후에후키 도우지를 본뜬 것이다.
또한, 1974년에는 하치미츠파이 유일의 싱글 음반 "너와 여행 가방(트렁크) / 취객 댄스 뮤직"에도 레코딩 엔지니어로 참가하고 있다.
후사 45 스튜디오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던 것도 있어, 소니 이적 후에는 엔지니어 일에서 일단 떨어졌지만, 2000년대 이후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마스터링하게 되어, 2004년에는 후사 45 스튜디오를 마스터링 장소로 활용했다.
그 후 발표된 30주년 기념반은 오랜만에 후에후키 도우지가 엔지니어를 맡고 있다.
과거의 작품은 모두 오타키가 엔지니어를 하고 있다고 오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니 이적 후에는 CD 제작에 관해서는 요시다 타모츠를 중심으로 한 외부 엔지니어를 기용했다. 그 외의 음원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고, 후사 45 스튜디오에 녹음 테이프를 가져가 스스로 오버더빙 작업을 자주 하고 있었다. 「행복한 결말」의 스트링스 버전 등은 후사 45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것이다.
텔레비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핫피 엔도 시대에는 몇 번 텔레비전에 출연했지만, 솔로가 된 이후는 1970년대 엘렉-컬럼비아 시대에 노래 프로그램 이외의 취재・인터뷰에 응하는 형태로 몇 번 출연했을 뿐, 1981년에 CBS・소니로 이적 후, 활동 재개 이후는 얼굴을 내밀고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것은 전혀 없고, 1983년3월 24일의 「웃어도 좋다」전화 출연이나, 1986년10월 15일 방영[34]의 제6회 일본 작곡 대상에 음성만의 코멘트를 남긴 정도였다(텔레비전 프로그램 「사노 요시하루의 더 송라이터즈」의 사노로부터의 직접적인 출연 오퍼도 거절했다).
단,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의미에서의 텔레비전 싫어하는 것이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매우 좋아해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전반은 자택에 비디오 데크가 20대 이상 있고, 그것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는 정도의 텔레비전 매니아였다. 주로 대相撲 중계를 좋아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관심이 없어, 처음으로 전부 본 텔레비전 드라마는 「러브 제너레이션 (1997년)」이었다. 그 후, 쿠도 칸쿠로 작품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미디어 출연은 거의 라디오에 한정된다. 1980년대 전반까지는 레귤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는 단발적인 특별 프로그램 출연이 메인이 되었다. 교우가 있는 인물이 DJ 또는 퍼스낼리티를 맡는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도 많이 있고,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84년부터 2011년까지 야마시타 타츠로와 함께 하고 있던 신춘 방담. 이 기획은 당초의 프로그램이 없어져도, 교우가 깊은 뮤지션이나 음악 평론가의 프로그램을 빌려 급한 불을 끄고, 25년 이상 계속되었다.
여러 연예를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교우 관계가 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은 음악의 계보에 대한 공부를 평생의 과제로 하고 있지만(「분모 분자론」「팝스 전」처럼 지상・라디오에서 그 성과를 엿볼 수 있다), 음악에만 그치지 않고 넓은 분야까지 “관련성”을 기저에 두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 "열공형 인물"이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오타키 에이이치와 마찬가지로 일본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뮤지션으로 코니다 하루오가 있는데, 코니다가 많은 저서를 발표한 데 비해 오타키는 라디오 방송을 주요 발표의 장으로 삼았다.
뮤지션 주도로 자체 레이블을 가지고, 프로듀스 크레딧을 넣고, CM송을 뮤지션으로서 본격적으로 만들고, 싱글에 카라오케 버전을 넣는 등, 선진적인 활동을 했으며, 이것들은 후에 표준이 되었다.
또한 일본의 대중음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야마시타 타츠로의 일부 작품, 시부야계 등에 영향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35].
※오리지널 앨범에 한정하여 기재. “NIAGARA TRIANGLE 시리즈”와 “NIAGARA CM SPECIAL 시리즈”, 『LET'S ONDO AGAIN』, 인스트루멘탈 앨범은 제외.
타이틀 | 발매일 | 오리콘 차트 최고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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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wood ⁄ KING | ||
오타키 에이이치 | 1972년 11월 25일 | 75위 |
NIAGARA ⁄ ELEC | ||
NIAGARA MOON | 1975년 5월 30일 | 77위 |
NIAGARA ⁄ COLUMBIA | ||
GO! GO! NIAGARA | 1976년 10월 25일 | 41위 |
NIAGARA CALENDAR | 1977년 12월 25일 | 60위 (1996년반, 오리지널반은 불명) |
NIAGARA ⁄ CBS/SONY | ||
A LONG VACATION | 1981년 3월 21일 | 2위 |
EACH TIME | 1984년 3월 21일 | 1위 |
NIAGARA ⁄ Sony Music Labels Inc. | ||
DEBUT AGAIN | 2016년 3월 21일 | 3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