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타이지(나카무라 타이지, 1939년〈쇼와 14년〉5월 21일[2] - 2020년〈레이와 2년〉12월 20일[3])는 일본의 작곡가, 작사가, 로커빌리 가수, 라디오 DJ, 배우, 탤런트이다.
나카무라 타이지 나카무라 타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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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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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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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39년5월 21일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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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0년12월 20일 (81세 사망)![]() |
학력 |
나라현립 다카다 고등학교중퇴[1] 오사카부립 이즈미 고등학교 중퇴[1] |
장르 | 가요쿄쿠 |
직업 | 작곡가·작사가·로커빌리가수·라디오 DJ·배우·탤런트 |
활동 기간 | 1957년 - 2020년 |
나라현기타카쓰라기군오지정 출신. 본명은 타이시라고 쓰고 ‘타이시’라고 읽는다(예명의 읽는 법을 ‘야스시’라고 했던 적도 있다). 크리스천 집안의 장남과 12살이나 차이 나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치과의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역에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어머니 혼자서 길러졌다[1].
중학생 때 동아리 활동으로 관악단에 들어가 트롬본 담당이 되었다. 행진곡의 리듬을 계속 연주하는 것에 지루함을 느껴, 부실에 있던 재즈 악보의 멜로디를 트롬본으로 불었다[1].
나라현립 다카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관악부가 없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께 부탁하여 부를 만들었지만, 2학년 때 엘비스 프레슬리와 닐 세다카 등의 로큰롤 음악을 접하고 오사카시・난바나 고베시・산노미야의 재즈 카페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로커빌리 붐이 한창이었고, 프레슬리를 따라 머리를 “리젠트로 하고 기타 케이스를 가지고 있으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춤도 배우고, 여자도 배우고, 재밌으니까 학교에 가지 않는다”가 되어, “놀러 다녀서 수업 일수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 후, “형이 나서서” 오사카부립 이즈미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지만, 2개월밖에 다니지 않았다[1].
18세에 우치다 유야와 사가와 미츠오의 밴드 “블루진 밥스”에 보컬리스트로 가입. “미카와 다이지”[* 1][4]라는 예명으로 연예계에 데뷔. 1962년, 도시바 레코드에서 이시자카 마사오(당시 명의는 사와노이 치에코) 작사의 「들개의 블루스」로 4장 정도 레코드를 발매했지만,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고, 그 후에는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재즈 카페에서 생계를 유지했다[4].
또한, 1965년경에는 소노시트로 「네리칸 블루스」를 제작. 네리칸이란 네리마 소년 분별소의 약자이며, 군가 민요 「스우짱」의 선율에 소년 수형자들의 회개와 불평을 실은 작품이었다. 퇴폐적・허무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금지곡으로 취급되었지만, 1973년, 후지 게이코의 앨범 「엔카의 여행 비단 牡丹 박치기」의 수록곡으로 약간 알려졌다[4].
1966년, 로커빌리 인기의 쇠퇴와 함께 무대에서 사라진 사가와에게 미카와 자신에게는 작곡자가 불명이라고 전해졌던 선율에 자신이 직접 쓴 가사를 붙인 곡을 제공하지만, 레코드 회사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발매는 무산된다. 그 곡은 소노 마리의 「꿈은 밤에 피어난다」의 원형이며, 18세 무렵 절도죄로 네리칸에 수감되었던 소네 유키아키가 당시 기타로 작곡한 것이었다. 나중에 소노 마리를 통해 발매되면서 보곡(채보)자의 크레딧에 본명인 「나카무라 타이지」로 게재된다[4].
1968년, 사가와에게 「지금은 행복한가」를 제공하여 75만 장의 대히트곡이 된다. 나카무라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성을 다한 작품이었다[4].
그 후, 호소카와 타카시의 『마음의 그리움』, 사쿠라다 준코의 『파랑새』 등 히트 메이커로 이름을 날렸지만, 같은 시기에 주요 우울 장애를 앓았다. 1972년, 33세에 나카무라가 작곡을 맡은 치아키 나오미의 『갈채』가 80만 장을 넘어서면서 탤런트 활동을 시작하는 등, 병식도 없이 순풍에 돛 단 듯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나카무라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고 말았다[5].
하지만 36세 무렵, 10년 지기 친구이자 오사카 방송국 프로듀서가 험악한 표정에 말수가 적은 나카무라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겨, 나카무라에게 정신병원 진료를 권유했다. 2년 후 나카무라는 정신병원을 찾아 우울증 진단을 받으면서, 비로소 병식을 자각하게 되었다[5].
나카무라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이 없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설교를 했다. 귀찮은 녀석이 되어 있었다. 4~5년 그런 상태였고, 모두들 엮이기 싫어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스타탄생』 심사위원으로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도 그때였다. 그때의 나를 아는 사람은, 지금도 싫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39세 때 작사·작곡한 아즈사 미치요 씨의 『소심한 사람』은 바로 나의 심정을 자각하고 표현한 가사였다.”라고 말하고 있다[5].
약은 처방받지 않았고, 그 후 나카무라는 평소 밝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1982년, 호소카와 타카시의 『북술집』이 히트하고, 「웃어도 좋다!」의 고정 출연이 결정되자, 더욱 쾌활한 성격으로 변해가면서, 밝게 생활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5].
1995년 제14회 나라현 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약 9만 표를 얻었지만 2위로 낙선했다. 그 후, 1996년에는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연합 추천으로 오사카 3구에서 출마했지만, 4명 중 최하위로 낙선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가수 활동을 재개하여 라이브도 활발하게 했다. 또한 나카무라는 자신의 음악을 Gold·Great의 ‘G팝스’라고 불렀다. 그 조건은
이었다[6]. 나카무라는 G팝스에 해당하는 음악가로 오다 카즈마사, 야마시타 타츠로, 호테이 토모야스, 라이세 타카오, 타마키 코지, 미나미 요시타카, 마츠토야 유미, 타케우치 마리야, ZARD, 모리타카 치사토, 아이묭의 이름을 들었다.
2020년 12월 20일 23시 50분 (JST), 간암으로 오사카시 병원에서 사망[3][7][8]. 향년 81세. 같은 해 9월 말경부터 건강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고, 10월 초순에 오사카 시립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간에 종양이 있다는 것이 같은 해 11월 16일에 발표되었다[9]. 같은 해 12월 5일에 오사카에서 열린 선상 무대가 마지막 활동이었다[3]. 오랫동안 과음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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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모두 TBS 텔레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