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는 러브송이나 에로틱한 내용의 악곡으로 인지되고 있지만, 악곡에 따라서는 풍자, 반전, 심지어는 성장한 일본에 대한 강한 애정이나 세계 평화 등의 메시지나 국민에 대한 응원이 담긴 것도 존재한다[34][35]. 또한, 사잔과 쿠와타의 악곡의 작풍이나 가창법은 일반적으로 일본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하고, 록의 리듬을 타고 빠르게 쏟아내듯이 부르는 소위 "혀 굴리기 창법"으로 알려져 있지만[36], 쿠와타 본인은 일본어가 지닌 와비사비의 감각을 더 음악에 담고 싶다는 의향을 보이고 있으며[37], 실제로는 그 외에도 「만나고 싶을 때 넌 여기에 없어」를 시작으로 아름답고 명확한 일본어 가사의 악곡을 제작하거나[38], 「JAPANEGGAE (자파네게에)」「토오리얀세」「싫은 일 투성이의 세상에서」처럼 고어나 사계절의 정경을 도입한 일본 정서를 느끼게 하는 내용의 가사를 록·팝스의 리듬을 타고 부르는 등, 악곡에 따라 표현을 바꿔 사용하고 있으며, 영어나 빠른 가창법을 도입하지 않는 스타일의 악곡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39][40][41][42]. 쿠와타는 베스트 앨범 『바다의 Yeah!!』과 『바다의 Oh, Yeah!!』을 비교해서 들어본 결과, 전자를 "영어와 일본어를 융합시키려고 여러모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흔적이 보입니다", 후자를 "역시 일본어를 소중히 여기고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면에 드러나 있습니다"라고 평가하며, 작풍의 변화를 자기 분석하고 있다[43].
2011년 동일본 대진재의 피해 지역 부흥 지원을 목적으로 발매된 팀 아뮤즈!!의 자선송 「Let's try again」에 멤버 전원이 참가하거나[44], 베스트 앨범 『바다의 Oh, Yeah!!』의 수익의 일부를 동일본 대진재나 2018년 7월에 발생한 서일본을 중심으로 한 호우 피해 등 여러 가지 자연재해의 피해 지역에 대한 기부금으로 사용하는 등, 음악 활동을 통해 사회 공헌도 하고 있으며[45], 피해 지역과 팬들을 격려하고 있으며[46][47][48], 쿠와타의 선도적인 행동력은 솔로·사잔을 막론하고 많은 라이브의 무대 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민타니 세이코우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있다[49][48].
특징
구와타 게이스케가 밴드 리더를 맡고 있으며, 악곡의 작사·작곡·보컬을 담당하고 있다[50]. 하라 유코는 악곡에 따라 코러스 워크나 카운터의 선율[주석 2]을 생각하는 역할도 맡고 있으며[52], 쿠와타는 하라를 "사잔 올스타즈의 나침반이며, 구와타 게이스케에게 있어 등대"라고 말하고 있으며[53], 또한, 타케우치 마리야나 쿠사노 마사무네 (스피츠) 등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사잔 올스타즈의 주체"라고 평가받고 있다[54][52]. 쿠와타는 사잔다움의 요인으로 마츠다 히로시의 존재를 들고 있으며, 하라와의 음악적인 궁합이 좋은 점을 칭찬하거나[55], 「사잔의 진정한 리더는 그(마츠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56]라고 말하고 있다. 쿠와타는 세키구치 카즈유키에 대해서는 "독특한 발상을 한다", "아티스틱", "사잔의 요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57], 음악 평론가 스즈키 스지는 저서 『사잔 올스타즈 1978-1985』에서 마츠다와 세키구치의 리듬 팀의 훌륭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58]. 쿠와타는 노자와 히데유키에 대해서도 "노자와가 두드리는 콩가와 봉고는 세계에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다", "털게의 소리는 털게에게서만 나온다", "퍼커션의 중요성을 나는 거의 그에게서 배웠다"[59], "이 사람이 없었다면 사잔은 3년 전[주석 3]에 해산했을 것 같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의 일만 말하고, 허세 부리는 타입이 아니지만, 털게가 있었기에 인간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60]. 쿠와타는 사잔의 멤버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고유의 음향이 있다고 말하며, 어머니의 카레라이스처럼 어떤 요소가 빠져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61]. 또한, 쿠와타는 사잔은 멤버 5명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스태프를 포함한 총칭이라고 말하며[62], 그룹으로서의 사잔의 특징을 "밴드라는 단위가 아니라, 모두가 즐거운 것을 공유하는 '음악 예능 집단'이라는 대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63].
쿠와타는 사잔을 디렉션할[주석 4] 때 가장 중요시하는 점으로 "자신을 포함한 멤버 전원의 밴드맨으로서의 기개와 자존심"을 들고 있으며[65], 멤버 전원은 남몰래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66]. 또한, 쿠와타는 드라마 『Sweet Season』( TBS 텔레비전)의 내용에 맞춰 「LOVE AFFAIR 〜비밀의 데이트」의 가사를 써내려 갈 때의 회의에서 "나는 (음악의) 천재가 아니니까, 단지 (음악을 좋아하니까) 남들보다 세 배는 노력하지만"이라고 말한 일화도 남아 있다[67]. 쿠와타는 영화 감독을 한 경험에서 "톱이 흔들리거나, '누군가 어떻게 해줘'라고 말해 버리면, 일은 결코 정리되지 않는다", "리더는 아무리 곤란해도, 약한 모습이나 갈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제왕학을 배우고 있다[68].
쿠와타는 사잔 올 스타즈를 해산시키지 않고 오랫동안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절대 사잔 올 스타즈는 해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깝잖아요!"라고 말했으며[69], 2005년에 개최한 전국 투어 ‘모두가 좋아합니다!’ 도쿄돔 공연 MC에서는 사잔의 활동에 대해 "앞으로도 천천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70]. 세키구치는 사잔이 오랫동안 계속된 비결을 "‘쉬엄쉬엄 하는 것뿐’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71]. 스즈키 스지(스지 스즈키)는 각 멤버의 연주력과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언급하면서 사잔을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잔이라는 밴드는 사실 연주를 잘한다", "테크니션 밴드"라고 평가했다[72][73].
사잔의 사이에 대해 쿠와타는 "역시 서로 젊었을 때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번 밴드 활동을 쉬는 동안, 날카로운 부분이 무뎌졌다고 할까(중략) 서로의 빛나는 부분을 찾기 쉬워졌습니다. 이제 와서 무리한 요구를 주고받느니, 그만큼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 좋으니까요"라고 말했다[65]. 쿠와타는 하라를 비롯한 가족과의 관계와 멤버들 간의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며[74], 2008년 무기한 활동 휴지 발표 당시에도 "멤버 한 명 한 명이 있어야 사잔입니다", "멤버 5명이 있고, 저는 이제 그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여기며, 평생의 파트너로서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습니다"라고 각 멤버를 배려하는 발언을 했다[75]. 쿠와타는 2018년 인터뷰에서 사잔은 가족과 같다고 말했다[76]. 여러 뮤지션들이 불륜이나 여성 문제 등의 스캔들을 일으키는 가운데, 쿠와타·하라 부부를 비롯한 사잔 멤버들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며, 성실하게 가정과 음악에 임하는 모습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77]. 또한, 솔로 활동이 활발해져도 멤버를 버리지 않는 쿠와타의 자세는 타케다 테츠야(카이엔타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평가받고 있다[78]. 음악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는 "하라씨는 물론이고, 멤버들과 스태프들도 그런 쿠와타의 인품에 매료되어 사잔 올 스타즈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74]. 또한, 스즈키 스지는 "원맨 밴드는 대개 빨리 망하죠. 쿠와타 케이스케라는 리더가 있고 (2018년 당시) 40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멤버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면 쿠와타는 리더이면서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위기 메이커'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72][73].
사잔의 활동에 집중하는 시기와 각 멤버가 솔로 활동에 집중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에, 세키구치는 "좋든 싫든, 어떤 구실을 만들지 않으면 움직이기 어려운 밴드"라고 표현했다[71]. 쿠와타는 "대본영 발표가 있는 편이 움직이기 쉽다고 할까, 먼저 흐름을 쫙 정하는 편이 모두 편하니까요. 그런 밴드입니다(웃음)"라고 말했다[65].
6월 25일을 데뷔 기념일로 하고 있다[79]. 기념일이나 절기를 소중히 여기는 밴드이며, 데뷔 기념일 등에는 매년 어떤 식으로든 화제가 마련된다[79].
10대부터 70대까지 폭넓은 연령층에 팬이 있으며[80][주석 5], 사잔의 악곡에 힘을 얻고, 마음의 지주로 삼고 있는 사람도 많다[82]. 음악 라이터 이시이 에리코는 2018년 베스트 앨범 ‘바다의 Oh, Yeah!!’가 32만 5천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동시에 1998년 베스트 앨범 ‘바다의 Yeah!!’도 약 9천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에 대해 "이것을 계기로 들어보자고 작품을 손에 든 사람들이 1만 명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하며, 이것을 근거로 사잔의 팬층을 "거의 일본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정의했다[83].
밴드 이름의 유래는, 쿠와타가 아마추어 시절 후지사와 청소년회관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위해 밴드 이름을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아, 미야지 쥰이치가 포스터를 제작하는 도중 임시방편으로 고안하여 당일에 쿠와타에게 전한 것. 미야지가 닐 영의 앨범 『애프터 더 골드 러시』를 레코드로 듣고 있으면서 포스터를 제작 중, 잠시 쉬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가 라디오를 듣고 있던 중 파니아 올스타즈의 일본 콘서트 광고가 나오고, 목욕탕에서 나온 후 켜놓은 레코드에서 위 앨범에 있는 곡 「서던 맨」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것들을 조합했을 때의 어감에 호감을 가지고, 또 당시 쿠와타의 집이 지가사키시 난고(낭고)에 있었던 것을 걸어[89]、「사잔 올스타즈」라는 이름을 고안했다[90].
밴드 이름 표기
정식 표기는 일관되게 카타카나 표기 「사잔 올스타즈」이지만, 싱글, 앨범의 재킷 등에 대해서는 카타카나 표기와 영어 표기 「Southern All Stars」또는 「SOUTHERN ALL STARS」의 것이 존재한다. 참고로, 『노래의 톱 텐』에 대해서는 1988년경, 오리콘 차트에 대해서는 1997년부터 1998년 사이, 각각 영어 대문자 표기로 표기된 적이 있다.
다른 명의로의 활동
앨범 『이나무라 제인』은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라는 성격상, 수록되어 있는 악곡에 따라 연주자 등의 멤버가 다르기 때문에, 동 앨범은 「사잔 올스타즈 앤드 올스타즈 (SOUTHERN ALL STARS and ALL STARS)」의 명의로 표기되어 있다[91][주석 6]. 또, 동 앨범의 개별 악곡 중 6곡은 「이나무라 관현악단」, 1곡은 「하라 유우코 & 이나무라 관현악단」, 4곡은 사잔 올스타즈 그대로의 명의로 표기되어 있다[91][주석 7].
그 외 다른 명의로의 활동으로는 세키구치의 솔로 앨범 『World Hits!? of Southern All Stars』에서 「세키구치 카즈유키 & 스나야마 올스타즈」[주석 8]가 결성된 것 외에, 미세스 존스 러버즈의 옴니버스 앨범 『SNOWBIRD HOTEL』[94]에서, 마츠다・노자와・오오모리를 중심 멤버로 하는 「S.A.S.Project」가 참가하고 있다.
폭넓은 음색과 테마의 악곡이 존재하는 이유로는, 桑田가 매너리즘을 싫어하는 것이 들 수 있다[136]. 그래서 「사랑의 언령 ~Spiritual Message~」「PARADISE」「옐로우맨 ~별의 왕자님~」등과 같이 마츠다가 말하길 「생각지도 못한 악곡」이나 「뜻밖의 악곡」이 제작되는 경우도 자주 있으며, 「자신의 틀을 깨는 혁신성」이 사잔의 즐거움과 재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136]. 하드록풍의 악곡을 제작할 때는 고집이 있으며, 桑田는 「하드록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화장을 해서 화려하게 하는 것이 사잔의 록에 대한 매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37].
악곡 제작 방법・녹음
桑田는 멜로디나 사운드를 내고 싶다는 동기로 작곡과 연주를 시작했기 때문에, 주로 악곡을 선율 우선으로 제작하고 있다[138]. 사잔의 대부분의 악곡의 녹음 형식은 먼저 桑田가 악곡과 중요한 단어의 일부를 만들고, 스튜디오에서 멤버, 세션 뮤지션, 스태프, 엔지니어 등에게 그것을 전달하고, 모두 함께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미지를 부풀려 가창과 오케스트라를 녹음한다. 그것과 병행하여 桑田가 작사에 착수하고, 일단 작사를 하고 노래 녹음을 시작한다. 이후 어레인지 등 세부 수정을 반복하여 악곡이 완성된다[139][140][62]. 인트로는 기본적으로 桑田가 고안하지만, 악곡에 따라 原이 손을 대거나, 「바다」「미스 브랜뉴 데이」등과 같이 처음부터 原이 고안하는 경우도 있다[141]. 악곡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내기 위한 이유로 桑田가 關口를 대신하여 베이스 등을 연주하거나[133], 關口가 고안한 베이스 프레이즈를 시퀀서로 입력하는 수법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133][142]. 최근에는 라이브에서 연주하는 것을 상정하여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143]. 과거 작품에는 제작했지만, 너무 공들인 나머지 라이브에서 재현할 수 없었던 악곡이 여러 곡 있다고 桑田는 말하고 있다[143].
초기에는 가사에 대해 “의미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요리로 치면 접시와 같은 것”이라는 감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138]. 하지만 활동이 계속되면서 팬들의 반응[144]과, 지원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고바야시 다케시와 오구라 히로카즈 등 구와타가 말하길 “가사를 매우 신경 쓰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세련된 것이 많아졌다[145]. 1990년대부터는 불교 용어와 관용구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146]. 서양 음악에 대한 동경에서 1980년대에는 전곡 영어 가사의 곡도 제작되었지만[주석 28], 2010년대부터는 영어를 의식적으로 줄이고 일본어를 중시하여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149]. 최근(2021년 시점) 대표작은 “가능한 한 평이한 단어를 선택하여, 소박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가사, 함께 걸어가는 듯한 템포감으로,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넘치는 작풍”이라고 평가받는다[150]. 구와타는 작사할 때 철저한 사전 조사를 실시하여 다양한 정보를 구석구석까지 확인하고 입력하며, 그것이 악곡의 아이디어로 이어진다고 노자와는 말하고 있으며, “주간지라면 전부 읽고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151]. 가사는 악곡의 테마와 관련된 인물 또는 그에 정통한 주변 인물이나 스태프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152], 거의 상상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153]. 가사 속에서 구와타 자신과는 다른 가수의 이미지나 페르소나[주석 29]가 설정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155]. 구와타가 제작한 악곡의 가사에는 앞서 언급한 의미를 중요시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선율이나 곡의 박자를 우선시하기 위해 문법이 틀린 것[156]이나, 잘못 알고 쓴 가사가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며[151][157], 스태프가 수정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창의 용이성 등을 이유로 구와타의 의향에 따라 대부분 그대로 남겨진다[156][157].
사잔의 레코딩은 주로 빅터 스튜디오의 “401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지만[95], 1992년경부터는 빅터 스튜디오와 별도로 구와타의 자택에 “고양이에게 금화 스튜디오”도 만들어져, 거기에 멤버들이 모여 악곡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159][160]. 기재에 대해서는, 마이크는 U-47, 컴프레서는 GML8900, 이퀄라이저도 GML 제품을 사용한다[158]. 사잔의 악곡은 대부분을 구와타가 제작·가창하지만, 세키구치·마츠다·하라·오오모리도 일부 악곡을 제작·가창하고 있으며[주석 30], 특히 구와타가 제작하고 하라가 가창하는 악곡은 많이 존재한다[주석 31][179]. 이에 대해 구와타는 “역시 사잔의 앨범에는 하라보가 보컬을 맡는 곡이 절대 빠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180]. 또한, 멤버 전원이 제작한 악곡이나 멤버끼리 공동으로 작곡한 악곡도 존재한다[주석 32].
사잔의 곡에는 이러한 내용의 가사에 용기를 얻은 청취자가 스스로를 고무시키는 요소도 존재하며[209], 그렇기 때문에 『주간 문춘』에서 "사잔 사운드가 국민적인 것은 단순히 인기가 많기 때문만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일본의 지금'이 모든 곡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받았고[210], 사잔 팬임을 공언하는 오타 히카리(폭소문제)는 "구와타 게이스케가 얼마나, 얼마나 일본을 밝게 했는가.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는가"라고 역설했으며[211], 사카이 와카나는 "구와타 씨의 목소리와 음악과 말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나의 자랑이다""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기운 나게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일본 전국을.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이라고 말하는 등 높이 평가받고 있다[212].
일본풍
구와타는 일본어의 정서를 "어떤 면에서 사잔이 하고 있는 것과 맞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며, "말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옛날부터 일본어가 가진 정서, '멋' 같은 것으로 자신의 감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비틀즈 등 외국의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역시 일본의 ‘와비’ ‘사비’ 감각이라는 것을 음악에 더욱 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213]. 또한, 일본적인 것에서 평화를 포함한 "‘화’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발언도 하고 있다[214][215]. 교육학자이자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인 사이토 타카시는 구와타의 가사에 대해 "일본어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넓히고 있다"고 평가하며, 문어체와 구어체의 혼재도 큰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216]. 또한 구와타가 자주 사용하는 아테지(이중 독음)에 대해서도 사이토는 "이러한 표현은 에도나 메이지 시대에 자주 보이는 표현입니다.(중략) 히라가나는 우리 몸에 스르르 들어오는 것, 한자는 지적인 것으로 머리 쪽으로 들어오는 것이므로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머리와 몸 양쪽에서 잡는 효과도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216]. 자신도 작사 작곡을 하는 나가세 토모야는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의 ‘기욧토이데 거대한 도시(데까이 마치)에’라는 구절에 대해 "그런 건 절대 생각해내지 못한다"고 코멘트하며 구와타의 아테지 감각에 놀라고 있다[217]. 음악 프로듀서인 카메다 세이지는 구와타에 대해 "'일본인이다'라는 것을 최대의 무기로 음악을 만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하며, 가사에 대해 "매우 일본적인 키워드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나 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을 구와타 씨는 매우 자연스럽게 음악 가사로 정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등 높이 평가하고 있다[218]. 주로 초기 작품에서 영어 가사 감수를 맡았던 고바야시 카츠야는 구와타에 대해 "일본인의 양악 콤플렉스를 해방시켜 준 남자""메이지나 다이쇼 시대 문호에 이어지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219].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이나 개그맨이자 뮤지션인 마키타 스포츠처럼 선율이나 코드 진행 등을 화양절충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225][226]. 특히 "JAPANEGGAE (자파네게에)"를 좋아하는 곡으로 꼽는 마츠다는 이러한 화양절충적인 노선을 "우리 나름대로의 일본풍 노선이랄까, 양악과 일본풍의 절충을 우리는 촌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으며, 산다의 악곡에 대한 균형 감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39].
일본어 가사를 중시할 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영어의 절충도 산다 가사의 특징 중 하나이며, "JAPANEGGAE (자파네게에)"의 ‘아이쿠네바’와 ‘I could never’[227]나 "Missing Persons"의 ‘아칸!!’과 ‘I CAN'T’ 등의 말장난이 사용되거나[137], "Brown Cherry"처럼 에로틱한 표현을 영어식으로 하거나[228], "요도미 시오레, 카레테 마에"에 나오는 ‘아이린 부케 쇼(아이린・ブーケ・쇼)’라는 신조어처럼 영어에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없고, 의미보다 영어적인 어감을 우선시하여, 문자 그대로 이미지를 확장시키는 구절도 있다[229].
"슈라바★라★밤바", "에로티카 세븐", "만피의 G★SPOT"는 팬이나 전문가 등 일부 사이에서 "에로스 3부작"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으며[235][236], 또 "Brown Cherry", "마이 페라 레이디", "경험II", "BOHBO No.5", "천국 온 더 비치" 등과 같이 제목이나 가사에 에로틱한 단어가 포함된 음악도 많이 있다[228][237][113][238][239]. 이러한 음악들도 신조어나 비유, 숨겨진 메시지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특징적이다[240][241]. 산다는 이러한 에로틱한 음악을 제작하는 이유에 대해 "음악은 역시 섹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중략) 그런 것이 더 솔직하게 가사로 하기 쉬워요. 이것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쌓였으니까 아닐까요(웃음)"라고 말하고 있다[242][113]. 또, 진지한 음악이나 아래의 반전이나 사회풍자를 테마로 한 음악으로 앨범이 심각해지기 쉬우므로, 에로틱한 작풍의 음악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균형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243].
산다의 에로틱한 표현에 대해, 사이토 타카시는 "일본인이 분명히 성을 만끽했던 에도 시대의 문학 작품에 통하는 것이 있다"[244], 토쿠미츠 마사유키는 "산다 씨는 정신적인 ‘영원한 동정’ 같은 점이 좋다", "에로 전개의 곡도 있고, 사소설 같은 아름다운 에로도 있다"[245], 미츠 맹그로브는 "섹스에 동경하는 중학생의 망상 같은 느낌이 가사에 나온다", "생생함이 없다", "이것이 생생한 에로라면, 남녀노소에게 지지받을 리가 없다"[245]고 평가하고 있다. 카야마 유조는 산다에 대해 "정말 좋은 사람. 마음이 훌륭하기 때문에, 저런 음란한 곡을 만들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246]. 카메다 세이지는, 하라 유코의 존재가 산다의 에로틱한 표현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산다 씨의 에로는, 귀여운 에로예요. 용서해 주세요, 모두 함께 파티를 즐겨요!'라는 분위기를, 하라 유코 씨의 존재가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247].
사회풍자・반전・평화
사회풍자나 반전 등을 주제로 한 곡들은 1982년 발매된 5집 앨범 『NUDE MAN』 무렵부터 제작되었으며, 「흐르는 구름을 쫓아서」「Computer Children」「괴물 군의 하늘」「정치가」「닛폰의 힐」「더러운 부엌」「01MESSENGER 〜전자광의 시〜」「나의 세기말 카르테」「평화의 류카」「PARADISE」「폭소 아일랜드」「피스와 하이라이트」「반딧불이」「평화의 종이 울린다」「Missing Persons」「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Relay〜숲의 시」 등이 있으며[248][249][250][251][35][252][236][253][254][128][255][204], 내용은 블랙기업이나 인터넷 사회, 일본 정치의 혼란, 보편적인 평화에 대한 소망,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 납북 일본인 문제, 메이지 신궁 외원의 재개발 계획 등 다양하다[256][257][128][204]. 이러한 주제의 곡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 구와타는 “빛을 그리려고 하면, 반드시 그 정반대에 있는 잊어서는 안 될 것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155] “밝기만 한 노래는 별로 재미없다”“어른이 되면 힘든 일이 많다”“세상이 불안하고 왜곡되어 있다면, 노래도 저절로 왜곡될 거라고 생각한다”[243] “나에게도 나의 일상이 있으니까, 모든 문제에 대해 매일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중략)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우연히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이 탄생했다면, 그것을 부를 수 없는 분위기도, 거기서 부를 수 없는 나 자신도 싫다”[258]는 등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인터뷰에서는 “어려운 것은 잘 모르겠다”라고도 말하고 있다[215]. SWITCH의 특집에서 “때때로 구와타 씨에게는, 잊어서는 안 될 것, 퇴색시켜서는 안 될 것에 대한 저널적인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인터뷰어인 우치다 마사키가 평가했을 때, 구와타는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259]. 또한, 구와타는 사회풍자 면에서는 마키 신지의 만담이나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캐츠가 출연했던 『어른의 만화』를 좋아했다는 점을[155], 반전 면에서는 비틀즈나 밥 딜런을 계기로 전쟁과 평화를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214]. 음악 평론가인 시부야 요이치는, 이러한 주제로 제작한 곡들을 “자신의 말의 메시지로 사회를 바꾸자, 정치에 항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구와타 게이스케도 (이미노)키요시로도, 노래로 만든 동기는 하나, 노래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구와타도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260].
구와타는 풍자는 과도하게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 반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세련되고 싶고, ○와 × 사이에 여러 가지 그라데이션이 있다고 생각한다”[243]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사실, 구와타가 풍자나 반전을 주제로 제작한 곡들은, 단순히 평화를 갈망하거나, 세태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인 사항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곡에 따라 부정적인 사항을 그린 위에 긍정적인 가사를 쓰거나[80], 앞서 언급한 일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국민의 생활에 곁들여 응원을 보내거나[주석 34], 평화보케를 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자책을 담거나[261], 작전 중 사망자나 유족의 심정에 공감하거나[257], 납북 일본인 문제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소요 등 중대한 인권 문제의 피해자의 심정에 공감하거나[주석 36][262][264], 해석을 듣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265], 온화한 커뮤니케이션을 호소하는 것도 존재하는[266] 등, 기교를 부리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옛날에는 가사에 과격한 구절을 넣은 적도 있었지만[267], 후년에는 “역시 흐름이 좋지 않으면, 날카로운 말투만의 나열이면, 역시 팝 뮤직으로서는.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율도 중요하고”“나도 이렇게 보여도, 컴플라이언스니 뭐니 옛날과 비교하면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260][268]. 구와타는 2015년 인터뷰에서 “메인스트림에서 풍자나 민중가요를 부르는 아티스트가 적은 현대에 외로움이나 사명감, 또는 자존심 같은 감정을 품는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전혀 없습니다. 거기는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젊은 시절에는 연애나 놀이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무엇보다 지금의 젊은이와 우리는 생활 환경도 정보량도 완전히 다를 테니까요”“(자신에게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것과, 에로틱한 곡을 많이 제작하고 있는 것을 언급한 후) 즉 나도 속물입니다”“하물며 싱어송라이터의 자존심 따위가 아니다”“굳이 말하자면 ‘충동’일까요. 작품으로서의 노래는, 원래는 충동적인 외침 같은 것이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있다[243].
반전가 제작에 대해 쿠와타는 "전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평화를 호소하는 데 있어 어떤 허무함도 어른이니까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기만 해도 말하지 않으면 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꿈 없는 세상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쿠와타의 반전을 호소하는 태도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특히 아버지는 만주 출신의 히키아게샤(귀환자)였기 때문에 만주에서의 이야기나 "품격과는 정반대의, 인간이 궁극적인 상태로 몰렸을 때의 모습"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258]. 전시 중 군인의 고뇌나 전사자와 유족에 대한 생각을 담은 악곡이 많기 때문에, 특히 "호타루(반딧불)"에 대해서는 타이업 영화 '영원의 제로'의 원작자 햐쿠타 나오키가 자신의 트위터에서 "가슴에 와 닿는 훌륭한 노래"라고 평가한 바 있으며[269][270], 사잔 팬임을 공언하는 변호사키타무라 하루오와 정치인 야마다 히로시로부터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271][272].
타이업처에 대한 배려
CM송이나 영화 주제가의 경우 타이업의 컨셉트와 내용에 맞춰 제작하는 경우도 있으며[주석 37], 쿠와타가 악곡보다 먼저 그런 이미지를 말로 멤버와 스태프에게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274][275]. 이에 대해 쿠와타는 "전혀 관계없는 곡이 '타이업 결정되었습니다'라고 해도 별로 재미없으니까"라고 말하고 있다[274]. 또한 타이업처의 컨셉트에 맞춰 편곡을 CD 음원과 다르게 의도적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으며, 예를 들어 영화 '영원의 제로'에서 사용된 버전의 "호타루"에서는 간주에 영전(제로센)의 엔진 소리가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가사가 없는 데모 테이프 단계부터 쿠와타 등의 의향으로 도입된 것이었다[276].
이러한 쿠와타의 태도는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시부야 요이치는 "아니, 거기가 또 대단해. 그리고 역시 옳아, 팝 뮤지션으로서"[274], 키시타니 고로는 "쿠와타 씨가 대본을 받고 곡을 쓰면 엄청난 것이 만들어진다"[116], 테라와키 야스후미는 "마음을 흔든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쿠와타 씨의 곡은 마음을 흔들거나 춤추게 하거나ーー귀로 듣는다는 것보다 마음으로 듣는다는 느낌. 쿠와타 씨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116]라고 말하고 있다.
라이브에서는 초기의 곡부터 당시 발표한 신곡까지 폭넓은 선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해마다 연주곡이 늘어나고 있다[282]. 2015년 시점에서 곡 수는 앵콜을 포함해 30곡을 넘는 경우가 많고, 공연 시간은 긴 경우 약 3시간 반에 달한다[283].
악곡에 따라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백모니터에 악곡의 테마에 맞는 영상이 투영되거나 댄서가 등장하기도 한다[284]. 또한, 격렬한 악곡에 맞춰 쿠와타가 관객을 흥분시키거나[285], 야외 라이브에서는 객석에 물을 뿌리기도 하는 것이 특징이다[286]. 여성 댄서와 어울리거나[287], 송이버섯과 전복으로 성기를 본뜬 신여를 등장시키거나, AKB48풍 의상을 입은 여성 댄서가 셔츠의 가슴 부분을 드러내며 매혹적인 춤을 선보이는 등 에로틱한 연출도 많이 볼 수 있다[288][주석 38].
MC에서는 멤버의 캐릭터를 살린 개그나 당시 유행, 장소에 맞춘 웃음을 중시한 연출을 많이 한다[291][292][주석 39]. 라이브에 따라 코스프레나 코미디를 하는 경우도 있다[주석 40][296]. 이에 대해 쿠와타는 라이브를 음악만으로 구성하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어쩌다가 장난을 쳤는데 그것이 먹히면 또 하고 싶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63]. 또한 최근에 자연재해가 발생한 경우 쿠와타가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경우가 있다[297]. 최근 라이브에서는 엔딩에서 쿠와타가 관객과 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모두 죽지 마라!", "힘내라!"라고 외치고 무대를 퇴장하는 경우가 많다[283][284].
2013년 스타디움 투어 『작열의 맘피!! G★스팟 해금!!』의 미야기 공연에서의 연등을 본뜬 『무지개 광장』[주석 45]이나 2025년 전국 투어 『THANK YOU SO MUCH!!』의 이시카와 공연에서의 「노토 부흥 응원 부스」 등처럼, 자연재해 피해 지역에서의 라이브 시에는 자선 활동을 겸하여 그 지역의 노점 등이 모여 요리나 특산품을 판매하는 부스가 설치되는 경우가 있다[304][305][306]. 이것도 팬이나 현지 사람들로부터 호평이며[306], 특히 현지 사람들로부터는 사잔과 구와타가 라이브를 한다는 것과 지역의 요리나 특산품을 판매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305].
1972년, 마츠다 히로시가 오오모리 타카시에게 드럼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두 사람이 만났다[19][주석 46]. 1974년, 구와타 게이스케와 세키구치 카즈유키가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입학, 포크송 서클에서 만나 록 밴드 「온센 안마 모모히키 밴드」를 결성했다[19][307]. 1975년, 오오모리와 하라 유코가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입학, 구와타나 세키구치와 같은 포크송 서클에 입부했다[19]. 구와타의 밴드는 「온센 안마 모모히키 밴드」에서 「피스톤 구와타와 실린더즈」로 개명하고, 오오모리는 점차 구와타의 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연습 현장에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19][307]. 하라가 구와타의 밴드에 참가하고, 밴드는 「아오가쿠 도미노스」「뇌졸중」「구와타 게이스케와 히치콕 극장」 등으로 이름이 변천한 후 「사잔 올 스타즈」로 개명했다[주석 47][19][307].
구와타가 바라던 사잔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멤버가 자주 바뀌었다. 오오모리는 구와타에게 마츠다를 소개하는 등 하여, 1977년 3월에 구와타, 오오모리, 하라, 마츠다, 아마노 와헤이[주석 48]에 의한 사잔으로 야마하 주최의 음악 콘테스트 「EastWest」에 신청했다. 그러나 예선 테이프 심사 시기에 아마노가 탈퇴하고, 대신 세키구치가 가입했다. 본선에서는 입상을 달성하고, 구와타가 베스트 보컬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때 마츠다는 결석하고 대신 오노 테츠오가 드럼을 담당했다. 본선 종료 직후 세미 프로의 노자와 히데유키가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만난 오오모리의 권유를 받는 형식으로 어물쩍 가입했다[주석 49][19][307][309][310][311]. 당시 멤버의 대부분이 시모키타자와 로프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영업 종료 후 가게 안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오너인 히라노 유도 「싼 월급으로 일하게 해주는 대신」으로 월 1회 정도는 라이브용으로 저렴하게 가게를 빌려주고 있었다[312].
레코드 회사는 빅터 음악 산업(현・JVC 켄우드・빅터 엔터테인먼트)으로 결정되었지만, 연예 기획사는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빅터의 디렉터인 타카가키 켄이 「여자 불러 부기」[주석 50]의 카세트를 가지고 사무소를 돌아다니고 있던 중, 당시 신흥 기획사인 아뮤즈의 사장 오오사토 요시키치가 관심을 가지고 연습 스튜디오를 방문한다. 이때 「멋대로 신드바드」를 선보이고, 오오사토가 「이 남자를 TV에 내보내면 재밌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계약이 결정되었다고 오오사토는 말하고 있다. 아뮤즈는 하라다 신지의 개인 사무소 같은 존재로 1977년에 설립된 회사였지만, 오오사토가 해산 직전의 캔디즈의 프로듀스에 전념하고 사무소 일에서 떨어져 있던 시기에, 록 지향을 강하게 하고 있던 하라다는 TV적인 판매 방식을 싫어하게 되고, 오오사토가 사무소 일에 복귀한 직후 이적해 버렸다. 사잔과의 만남은 이 사건 2주 후이며, 만약 하라다가 이적하지 않았다면 사잔을 할 여유는 없었다고 오오사토는 말하고 있다[313].
한편, 버닝 프로덕션 사장 슈보우 이쿠오는 빅터의 디렉터 히가시모토 아카루로부터 「勝手にシンドバッド」 등 5곡을 듣고 마음에 들어 했지만, 사잔은 호리프로 직원이었던 오쿠다 요시유키가 이노우에 요스이와 함께 설립한 「리본·나카요시 그룹」이라는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5000만 엔을 지불하고 권리를 넘겨받아 당시 출자하고 있던 아뮤즈 사장인 오오사토에게 소개하여 아뮤즈 소속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이 경위는 오오사토는 모른다고 한다)[314]. 이로부터 「勝手にシンドバッド」부터 「이토시노 엘리」까지 5곡의 저작권은 버닝 퍼블리셔즈가 보유하고 있다(아뮤즈로부터 음악 출판권을 돌려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작품은 아뮤즈가 보유하고 있다)[314].
데뷔를 향해 차근차근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멤버 전원이 다른 레코드 회사의 계약서에 사인해 버리는 사건이 있었지만, 빅터 관계자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315]. 이 시기에는 아직 학생 밴드의 추억 만들기적인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315]. 쿠와타는 이 무렵에는 아직 사잔의 리더는 아니었지만, 연예 기획사와의 계약에 있어 멤버 전원이 대졸 초임급을 받을 수 있도록 협상했다[316].
메이저 데뷔
1978년 6월 25일 싱글 「勝手にシンドバッド」로 빅터에서 메이저 데뷔했고[317], 8월에 첫 번째 앨범 『아츠이 무네사와기』를 발매했다[318][319]. 같은 해 8월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텐』에 스포트라이트 코너에 첫 출연했다[320]. 이때 쿠와타가 「주목받고 싶어하는 예능인입니다」라고 발언하여 이미지 형성에 박차를 가했지만[321][322], 후에 이 발언은 대본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322]. 「勝手にシンドバッド」는 TV 프로그램에서 공개된 것도 있어 대히트가 되었다[322]. 당시 쿠와타의 일본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하여 록에 실은 소위 「말림 혀 가창법」은[36][323], 음악 팬과 관계자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이 일었다. 쿠와타는 이 가창법과 전술한 작사·작곡법을 아마추어 시절부터의 관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이 비판받은 것을 의외로 생각했다고 한다[324]. 같은 해 11월 두 번째 싱글 「기분 시다이데 세메나이데」를 발매했고, 같은 해 12월부터 1979년 1월에 걸쳐 공식 데뷔 콘서트 「무네사와기」를 개최했다[325][주석 51]. 이 무렵은 상기 방향성의 영향으로 코믹 밴드로 인식되거나, 일발 역으로 끝나 버릴 가능성을 우려하는 풍조가 있었다[주석 52][327].
1979년 3월 세 번째 싱글 「이토시노 엘리」[317], 같은 해 4월 두 번째 앨범 『10넘버즈·카랏토』를 발매했다. 「이토시노 엘리」는 출하 매수가 125만 장을 기록했고[주석 53], 「勝手にシンドバッド」에서의 일발 역을 작품성으로 회피하고, 그 폭넓은 면모로 팬을 비롯한 많은 시청자·청취자를 놀라게 했다[주석 52][327][322][330]. 『10넘버즈·카랏토』를 제작하고 있던 기간은 「이토시노 엘리」의 히트도 있어, 병행하여 잡지의 취재나 TV 출연, CM 촬영, 라이브 활동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331], 정신적으로도 침체되어 있었다고 한다[332]. 연말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이토시노 엘리」로 첫 출연했다[331].
1983년에는 음악계에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디지털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같은 해 3월 발매된 17번째 싱글 "바디 스페셜 II"부터 사잔도 하라가 신시사이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발매된 6번째 앨범 "키레이"부터 신시사이저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운드가 되었다[345]. 같은 해 11월에는 19번째 싱글 "도쿄 셔플"을 발매했고, 연말에는 계속해서 세 번째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해당 곡을 선보였다[346][347]. 1984년 6월에는 20번째 싱글 "미스 브랜뉴 데이"가 발매되어 엄청난 인기와 평가를 받았다[338]. 같은 해 7월에는 7번째 앨범 "인기자로 가자"가 발매되었다. 12월에는 공식적인 형태로 첫 번째 연말 라이브 "엔기자로 가자"가 개최되어 "일본 최초의 연말 라이브", "연말 라이브의 원조"라고 불리고 있다[주석 59][350][351].
1985년 9월에는 첫 번째 2장짜리 앨범 "가마쿠라"를 발매했다[주석 60]. 신시사이저를 더욱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운드가 되었고, 5개월 동안 제작에 매달렸다[338]. 제작 시기에 하라가 육아휴직에 들어갔고, 1986년 4월에는 사잔은 1년간 한정으로 활동을 일시 중단했다[353][354]. 쿠와타와 마츠다는 쿠와타 밴드로서 활동했고,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솔로 활동에 들어갔다. 이 활동 중단에 대해서는 쿠와타가 "모두가 솔로 활동을 하고, 하나하나가 다른 개성으로 나온다면 이상적이겠네"라고 제안했고,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대로였다면 사잔은 붕괴 직전이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과 사잔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분위기가 멤버 모두에게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355]. 1987년 6월에는 발라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발라드 2 '83~'86"가 발매되었다[356].
10주년, 고바야시 다케시와의 제작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1988년 6월 25일, 24번째 싱글 "모두의 노래"를 발매하고 사잔으로서의 활동을 재개했다[317]. 이 싱글부터 음악 프로듀서고바야시 다케시가 어레인지, 프로듀스를 함께 하게 되었다[357][주석 61]. 7월에는 전국 구장 9곳에서 라이브 "真夏の夜の夢 大復活祭"를 개최했다[346]. 11월부터 9번째 앨범 "사던 올 스타즈"와 쿠와타가 감독을 맡은 영화 "이나무라 제인"의 사운드트랙이자 사잔의 10번째 앨범이 되는 "이나무라 제인"의 제작에 들어갔다[359]. 1989년 6월에 발매한 26번째 싱글 "사요나라 베이비"가 오리콘 주간 랭킹 1위를 차지하며 데뷔 11년 만에 싱글 첫 1위를 달성했다[360]. 7월에는 45만 장 한정 베스트 앨범 "수박"가 발매되었고, 이것은 예약만으로 완판되었다[361]. 12월에는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다[362].
1990년 1월, 앨범 "사던 올 스타즈"가 발매되어 12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자신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340]. 바로 이 앨범을 가지고 전국 투어 "꿈에서 만나자 SHOW"가 개최되었다. 7월에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 "이나무라 제인"의 주제가이자 28번째 싱글 "한여름의 과일"을 발매했다. 85만 장을 기록하는 히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대표곡이 되었다[주석 53][주석 62][364]. 9월에는 앨범 "이나무라 제인"이 발매되었고, 이것도 판매량이 130만 장을 넘어 앨범 2작품 연속으로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340]. 12월에는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다[365]. 1991년 전반에는 하라가 솔로로 활동했고, 7월에 사잔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여 29번째 싱글 "네오 브라보!!"를 발매했다. 8월에는 전국 투어, 12월에는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다[366]. 동시에 8월부터 세키구치가 장기 휴양에 들어갔다[367][368].
1993년 11월 34번째 싱글 "크리스마스 러브 (눈물 뒤에는 흰 눈이 내린다)"를 마지막으로 고바야시가 사잔(쿠와타 솔로 포함)과의 공동 작업에서 떨어져 나왔다[357]. 이에 대해 쿠와타는 고바야시의 편곡가 및 뮤지션으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고바야시는) 위험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잔의 정규 멤버들을 제치고 고바야시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다는 의미다[357][371]. 이후 작품들은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아 발매하게 되었다. 12월에는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고, 1994년부터 쿠와타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366]. 같은 해 12월 일본무도관에서 개최된 Act Against AIDS 이벤트에 사잔이 출연했다. 이때부터 세키구치가 휴식에서 복귀하여 오랜만에 멤버 6명이 모두 모였다[372].
2000년 1월, 사잔 올 스타즈는 44번째 싱글 "쓰나미"를 발매했습니다[381]. 이 곡은 당시 TBS 계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운난노 혼토코!’의 코너 ‘미라이 니키 III’의 테마송으로 사용되었고, 약 3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에로티카 세븐"의 최고 판매 기록을 경신했습니다[340]. 또한 당시 오리콘 역대 싱글 랭킹에서 3위에 랭크인했으며[382], 같은 해 제42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26]. 이 때문에 이 곡은 "사잔 올 스타즈를 국민적 밴드로 평가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383]. 8월에는 桑田(쿠와타)의 고향인 지가사키시 주민들의 서명 운동[주석 63]에 힘입어 이틀간의 야외 라이브 ‘사잔 올 스타즈 지가사키 라이브’를 개최했습니다[385]. 라이브에 맞춰 제작된 45번째 싱글 "호텔 퍼시픽"을 발매하여 80만 장이 넘는 히트를 기록했습니다[340][386]. 11월에는 46번째 싱글 "이 푸른 하늘, 미도리 ~블루 인 그린~"와 발라드 시리즈 제3탄 ‘발라드 3 ~더 앨범 오브 러브~’가 발매되었습니다[387]. 앨범은 29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발라드 시리즈 사상 최고 판매 기록을 세웠습니다[340]. 그 직후, 大森(오오모리)이 휴식을 발표하고 12월에 개최된 연말 라이브에 불참했습니다[388].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멤버들은 밴드의 향후 발전을 목표로 솔로 활동을 했습니다[389][12]. 2001년 8월, 大森(오오모리)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멤버에서 탈퇴했습니다[12]. 이후 멤버 충원 없이 5인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桑田(쿠와타)는 "사잔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시련, 정신적 구조 개혁이었다"고 말했습니다[390].
2005년 6월에는 데뷔 싱글 "맘대로 신드바드"부터 "쓰나미"까지의 싱글 44곡을 12cm CD로 재발매했습니다. 7월 4일자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에서는 44곡 모두 톱 100에 랭크인하며, 마츠토야 유미가 보유하고 있던 동일 아티스트 싱글 TOP 100 동시 랭크인 수 17곡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393]. 같은 해 8월에는 "ROCK IN JAPAN FESTIVAL 2005"에 사잔으로서 처음 출연했습니다[394]. 같은 해 10월에는 ‘가마쿠라’ 이후 두 번째 2장짜리 오리지널 앨범이자 14번째 앨범인 ‘킬러 스트리트’를 발매하여 1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340]. 발매 후 두 번째 돔 투어가 개최되었습니다[389]. 2006년 8월에는 52번째 싱글 "더티 올드 맨 ~사라바 여름이여~"를 발매하고, 사잔으로서 ‘THE 무진토 Fes.’에 출연했습니다. 2007년 1월, 빅터와 아뮤즈가 사잔과 솔로 악곡 관리 및 배포 등을 담당하는 합작 회사 "타이시타 레이블 뮤직"을 설립했습니다[395]. 같은 해 桑田(쿠와타)는 싱글 발매 및 투어 개최, 原(하라)는 영화 주제가를 작곡하는 등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활동했습니다[389].
30주년, 활동 무기한 휴지
2008년 1월, 멤버들은 "사잔이라는 간판에 의존하지 않고, 사잔의 활동만을 기대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가자"는 방침을 정하고, 5월 19일 30주년을 기념하는 53번째 싱글 "아이 엠 유어 싱어" 발매 및 라이브 등의 활동, 프로모션 발표와 동시에 2009년 이후 멤버 각자의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사잔으로서의 활동을 무기한 휴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주석 64][396]. 이 활동 휴지에 대해서는 발표 당일 NHK의 ‘오하요우 니혼’이 보도한 것을 비롯해 민영 방송 각국에서도 대대적인 보도 및 특집이 방영되었고, 발표 후 소속사인 아뮤즈의 주가가 급락하며 "사잔 쇼크"라고 불렸습니다[397][398]. 또한 발표 직전인 2008년 5월 12일 도쿄 스포츠지에서 "사잔 해산설" 등의 잘못된 보도가 나와 팬과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399]. 이에 대해 桑田(쿠와타)는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서 "(사잔의) 해산은 절대 없다"고 단언하며 해산설을 일축했습니다[75][400].
2009년부터 각자 솔로 활동을 펼쳤다. 2012년 12월, 桑田(쿠와타)와 스태프들 사이에서 35주년을 맞이하여 논의가 시작된 것을 계기로 “팬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자”는 의견이 모여 멤버 5명의 마음이 일치하여 사잔의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주석 65][401][402]. 이 활동 휴지 기간에는 2010년 桑田(쿠와타)의 식도암으로 인한 요양과 투병, 2011년 동일본 대진재 복구 지원을 위한 “팀 아뮤즈!!” 결성[44]과 桑田(쿠와타)의 “미야기 라이브” 개최[403] 등이 있었고, “지금까지 없었던 농밀한 5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401].
35주년, 5년 만의 활동 재개
데뷔 35주년인 2013년 6월 25일 활동 재개를 발표[404]했다. 같은 해 8월 54번째 싱글 “피스와 하이라이트”를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며 1980년대~2010년대 4개 시대에 걸쳐 싱글 차트 1위를 달성, 국내 그룹으로서는 사상 초유의 쾌거를 이루었다[30]. 같은 해 8월 10일부터 9월 22일까지 전국 투어 ‘작열의 맘피!! G★스팟 해금!!’을 시작했다. 12월에는 투어를 영상화한 작품을 발매하여 영상 작품으로서도 사상 최초로 4개 시대 1위를 기록했다[405].
2014년 9월에는 55번째 싱글 “도쿄 빅토리”를 발매했다. 12월에는 사잔의 악곡 266곡이 아이튠즈 스토어에서의 배포가 해금되어 일본을 포함한 111개국에서 배포를 시작했다. 동시에 모라에서도 배포가 시작되었다[406]. 연말에는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다. 병행하여 31년 만에 네 번째로 NHK 홍백가합전에 시크릿 게스트로 중계 출연하여 “피스와 하이라이트”, “도쿄 빅토리”를 선보였다[407].
2015년 3월에는 ‘킬러 스트리트’ 이후 약 10년 만의 15번째 앨범 ‘포도’를 발매[408]했고, 앨범에서도 4개 시대 1위를 달성했다[409]. 같은 해 4월부터 8월까지 전국 라이브 투어 ‘맛있는 포도의 여행’을 개최[410]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사잔으로서 싱글, 앨범 발매나 라이브는 없었지만[407], 2017년에 처음으로 출연한 광고, 아사히 음료 ‘미츠야 사이다’에 멤버 전원이 다시 출연했다[411][주석 66].
2020년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연예 이벤트와 음악 라이브가 중단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287]. 이로 인해 스태프들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구와타 게이스케는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며, 사잔 올 스타즈는 “Keep Smilin’〜“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을 슬로건으로 내건 특별 기획을 시작했다. 데뷔 42주년을 맞은 6월 25일에는 무관중 온라인 라이브 ‘Keep Smilin’〜여러분, 감사합니다!!〜’를 개최했다[287]. 이 라이브는 감사를 테마로 하여 팬들과 400명의 스태프, 그리고 코로나19 치료 의료기관에 대한 감사를 담은 공연이었다[421].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일반 라이브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무대를 설치하여 공연이 진행되었다[422]. 리허설 스튜디오와 요코하마 아레나 내에는 아크릴 판이 설치되었고, 멤버와 출연자, 스태프의 체온 측정, 소독,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구와타 게이스케와 여성 댄서 간의 접촉 금지 등 감염 확산 방지 대책을 철저히 시행했다[287][423]. 스태프들은 마스크나 페이스 실드를 착용했다[424]. 티켓은 공연 당일까지 판매되었고, 티켓 구매자 수는 18만 명, 추정 시청자 수는 약 50만 명이었다[425]. 라이브 수익의 일부는 아뮤즈 모금을 통해 코로나19 치료 및 연구 개발에 종사하는 의료기관에 활용되었다[421]. 같은 해 12월 31일에는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무관중 연말 라이브 ‘Keep Smilin’〜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폭풍을 부르는 맘피!!〜’가 개최되었다[426]. 이전과 달리 멤버와 스태프의 코로나19 예방 및 같은 해 8월 마츠다가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복귀하는 첫 라이브였기 때문에, 사전 녹화된 영상이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426].
2021년과 2022년에는 사잔 올 스타즈 명의의 싱글 및 앨범 발매는 있었지만 라이브는 없었고[427][428], 사실상 활동 휴지 상태였지만, 멤버들로부터 활동 휴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45주년, 10년 만의 지가사키 라이브, 유튜브 최고 기록 달성
데뷔 45주년인 2023년 6월 25일 전날인 6월 24일, 구와타 게이스케의 라디오 프로그램 ‘구와타 게이스케의 상냥한 밤놀이’에서 같은 해 7월부터 3개월 연속 신곡을 온라인으로 발매하고, 같은 해 가을에 10년 만에 지가사키 공원 야구장에서 ‘지가사키 라이브 2023’을 개최한다고 발표했다[429][430]. 이와 함께 발표된 코멘트와 신곡 “본길리 연가”, “노래하라 일본의 하늘”의 가사에는 고향인 일본과 지가사키시에 대한 강한 애정이 담겨 있다[429][431]. 45주년을 기념하여 개설된 특설 사이트에는 후자의 악곡 가사를 인용한 ““여기가 고향 노래하라 일본의 하늘” 사잔 올 스타즈, 출동!! ”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게재되었다[432]. 실제 라이브 현장에서는 4일간 7만 2000명을 동원했고, 9월 30일과 10월 1일에는 전국 약 270개 영화관에서 라이브 뷰잉으로 생중계되어 총 27만 2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198]. 또한, 이 라이브의 사업비는 본 공연과 라이브 뷰잉을 합쳐 약 15억 엔, 경제 파급 효과는 가나가와현 내에서 약 59억 5600만 엔, 전국적으로는 약 179억 5700만 엔에 달했다[433].
또한, 데뷔 45주년을 맞은 2023년 6월 25일에는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사잔 올 스타즈 45주년!! 감사의 “45곡” 라이브 방송 특별 프로그램 「그거, 몇 년? 그렇지 대충 그렇지」on YouTube’를 긴급히 실시하여, 트위터 트렌드에는 “#사잔45”를 비롯한 프로그램 관련 키워드가 10개 이상 50위 이내에 랭크인하는 등 SNS를 장악했고, 라이브 방송 프로그램으로서는 유튜브에서 실시간 1위를 기록했다. 또한, 유튜브에 공개된 45주년 티저 영상은 급상승 차트 5위에 오르는 등 여러 곳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당일에 공지되고 방송된 영상은 모두 과거 영상이며, 이미 작품화된 것과 방송된 것 중에서 선정되었고, 아카이브 방송은 하지 않는 일회성 특별 프로그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자체의 동시 접속자 수(시청자 수)는 최대 18만 명을 넘는 등 역대 최고령 최고 기록을 달성하며, ‘국민적 록 밴드’라고 불리는 사잔의 인기와 영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434][435].
많은 팬들에게 사잔 올 스타즈는 다양한 음악성, 퍼포먼스, 멤버들의 개성을 포함해 ‘훌륭한 엔터테인먼트’로 즐기고 ‘청춘의 한 페이지’로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전해지며[81], “일본의 보물”, “국보 밴드”, “국민적 밴드”, “일본 최고의 팝스 그룹”, “일본인들에게 있어 ‘마음의 고향’”이라고 평가받는다[440][441][442][194]. 멤버들의 인품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2014년 빅터 스튜디오를 취재한 ‘주간문춘’은 사잔 올 스타즈를 “일본 최고의 환대 밴드”라고 평했다[443].
팬들에 대한 대응도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치프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멤버 전원이 팬레터를 모두 읽어보고, 답장 엽서가 동봉된 것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답장을 쓴다고 한다[444]. 또한, 쿠와타는 공식 게시판[249]이나 라이브 후 설문조사 의견[445]도 읽어보고, 그것에 공감하거나[445] 라이브 연출의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249].
사잔 올 스타즈의 악곡에는 쿠와타의 출신지인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와 주변 도시가 자주 등장하며, 시 관계자를 비롯해 인지도와 경제적 기여를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가 많다[195][439]. 이러한 이유로, 지가사키를 테마로 한 악곡을 특집으로 다룬 Singing 특설 사이트에서는 “‘고향을 노래하는 일본인 뮤지션’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모래 섞인 지가사키’로 유명한 사잔 올 스타즈를 떠올릴 것입니다”라는 평가가 나와 있다[194].
쿠와타와 친분이 있는 세라 마사노리는 자신이 결성했던 트위스트[주석 70]와 달리 밴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잔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며, "사잔은 노쇠할 때까지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510].
사잔과 마찬가지로 여름, 바다, 쇼난을 테마로 한 곡들을 많이 히트시킨 튜브와는 자주 비교되는 일이 많고, 쿠와타는 그것을 반쯤 자조적으로 소재로 삼는 경우가 있다[511]. 양측 모두 재능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거나, 쿠와타가 튜브의 악곡 "시즌 인 더 선"을 커버한 적도 있다[주석 71]. 튜브는 데뷔 전 참가했던 오디션에서 사잔의 곡으로 출전한 적이 있으며, 튜브의 보컬 마에다 노부테루는 "사잔 올스타즈가 없었다면 밴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2024년 8월 12일 방송된 '아키시카 홍백!'(NHK 종합 텔레비전)에서 말했다[512].
카메다 세이지는 "사잔은 '어른의 세계에는 이런 즐거움이 있다고!'라고 공중파를 타고 국민적 수준으로 알린 획기적인 밴드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쿠와타 씨는 아무리 장난을 치거나, 아무리 강렬한 메시지를 내보내거나, 아무리 엣치한 말을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러브&피스'이고, 파괴적인 퍼포먼스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513].
2003년 HMV가 발표한 '일본 음악 아티스트 중요 100인(Top 100 Japanese pops Artists - No.1)'에서 사잔이 1위로 선정되었고, 쿠와타도 개인으로 12위에 선정되었다[514].
7월 19일 다엔 콜로세움 7월 20일 다엔 콜로세움 7월 23일 홋카이도 코세이넨킨 카이칸 7월 24일 아사히카와 시민 문화회관 7월 27일 토마코마이 시민 회관 7월 29일 미야기현 현민 회관 7월 30일 코리야마 시민 문화 센터 8월 24일 니가타현 현민 회관 8월 25일 조에쓰 문화회관 8월 27일 토야마 시 고코도 8월 28일 가나자와 시 관광 회관 9월 1일 스즈카 시민 회관 9월 2일 나고야 시민 회관 9월 4일 기후 시민 회관 9월 5일 카리야 시민 회관 9월 7일 페스티벌홀 9월 28일 와카야마현 현민 문화회관 9월 29일 히메지 시 문화 센터 10월 1일 고베 문화홀 10월 16일 아오모리 시민 문화홀 10월 17일 이와테현 현민 회관 10월 22일 야마가타현 현민 회관 10월 23일 아키타현 현민 회관 10월 25일 야마구치 시민 회관 10월 26일 쿠라시키 시민 회관 10월 27일 후쿠야마 시민 회관 10월 29일 히로시마 우편저금 회관 10월 30일 시마네현 현민 회관 11월 1일 교토 카이칸 11월 5일 이와타 시민 문화회관 11월 6일 시미즈 시민 회관 11월 7일 야마나시현 현민 회관 11월 11일 나가오카 시 문화회관 11월 12일 후쿠이 시 문화회관 11월 14일 우에다 시민 회관 11월 20일 미야자키 시민 회관 11월 21일 가고시마현 문화 센터 11월 23일 칸온지 시민 회관 11월 24일 마쓰야마 시민 회관 11월 25일 고치현립 현민 문화홀
7월 4일 치가사키 시민 문화회관 7월 7일 오다와라 시민 회관 7월 8일 야마나시현 현민 회관 7월 11일 쿠마가야 카이칸 7월 15일 고치현립 현민 문화홀 7월 16일 마쓰야마 시민 회관 7월 18일 야마구치 시민 회관 7월 19일 히로시마 우편저금 회관 7월 20일 히메지 시 문화 센터 7월 25일 교토 카이칸 7월 27일 가나자와 시 관광 회관 7월 28일 토야마 시 고코도 7월 30일 니가타현 현민 회관 7월 31일 나가노 시민 회관 8월 4일 다엔 콜로세움 8월 5일 다엔 콜로세움 8월 6일 다엔 콜로세움 8월 8일 오카야마성 특설회장 8월 11일 우쓰노미야 시 문화회관 8월 12일 군마현 현민 회관 8월 15일 후쿠오카 선 팰리스 8월 18일 미야자키 시민 회관 8월 19일 가고시마현 문화 센터 8월 22일 쿠마모토 시민 회관 8월 23일 츠마고이 엑시비션홀 8월 25일 토요하시 킨로 후쿠시 카이칸 8월 26일 요카이치 시민홀 8월 29일 아오모리 시민 문화홀 8월 30일 아키타현 현민 회관 9월 1일 미야기현 현민 회관 9월 2일 이와테현 현민 회관 9월 4일 야마가타현 현민 회관 9월 7일 와카야마현 현민 문화회관 9월 8일 고베 국제회관 9월 10일 페스티벌홀 9월 12일 선시티 코시가야 시민홀 9월 13일 지바현 문화회관 9월 16일 요코하마 문화체육관 9월 19일 쿠시로 시민 문화회관 9월 21일 홋카이도 코세이넨킨 카이칸
1982년
사랑으로 금붕어를 구할 수 있을까? 사잔 올 스타즈 Paa Poo 투어 '82
전 9공연
1월 9일 후쿠오카 선 팰리스 1월 11일 히로시마 우편저금 회관 1월 12일 페스티벌홀 1월 14일 미야기현 현민 회관 1월 19일 홋카이도 코세이넨킨 카이칸 1월 22일 가나자와 시 관광 회관 1월 23일 나고야 시 고코도 1월 25일 일본무도관 1월 26일 일본무도관
1982년 - 1983년
청년 사잔의 흐릿한 사회학 투어 THE NUDE MAN
전 57공연
1982년 9월 21일 시즈오카 시민문화회관 9월 24일 군마현민회관 9월 26일 우쓰노미야 시 문화회관 9월 27일 이바라키현립현민문화센터 10월 5일 구루메 시민문화센터 10월 6일 미야기현민회관 10월 7일 야마가타현 현민회관 10월 9일 아키타현민회관 10월 11일 하치노헤 시 공회당 10월 19일 구마모토 시민회관 10월 20일 사세보 시민회관 10월 22일 미야자키 시민회관 10월 23일 사가현 종합체육관 10월 25일 고쿠라 시민회관 10월 27일 고치현립현민문화홀 10월 28일 마쓰야마 시민회관 10월 29일 다카마쓰 시민회관 11월 1일 오카야마 시민회관 11월 2일 후쿠야마 시민회관 11월 8일 와카야마현민문화회관 11월 10일 고베 국제회관 11월 13일 시마네현민회관 11월 15일 방후 시 공회당 11월 16일 히로시마 우편저금회관 11월 18일 니가타현민회관 11월 19일 조에쓰 문화회관 11월 20일 나가노 시민회관 11월 23일 나라현 문화회관 11월 25일 기후 시민회관 11월 26일 요카이치 시 문화회관 11월 27일 도요하시 근로복지회관 11월 30일 후쿠이 시 문화회관 12월 1일 도야마 시 공회당 12월 6일 가고시마현 문화센터 12월 7일 오이타 문화회관 12월 8일 나가사키 시 공회당 12월 10일 교토 회관 12월 14일 지바현 문화회관 12월 15일 하치오지 시민회관 12월 18일 요코하마 문화체육관 12월 21일 후쿠시마현 문화센터 12월 22일 이와테현민회관 1983년 1월 6일 홋카이도 후생연금회관 1월 7일 홋카이도 후생연금회관 1월 13일 나고야 시민회관 1월 14일 나고야 시민회관 1월 16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17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18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20일 페스티벌홀 1월 21일 페스티벌홀 1월 23일 페스티벌홀 1월 28일 가나자와 시 관광회관 1월 29일 가나자와 시 관광회관 2월 2일 도쿄 후생연금회관 2월 3일 도쿄 후생연금회관 2월 4일 도쿄 후생연금회관
1983년 - 1984년
SAS 대단한 발표회 나는 속았다!! 투어 '83〜'84
총 49회 공연
1983년 10월 24일 가나가와현민홀 10월 25일 가나가와현민홀 10월 27일 홋카이도 후생연금회관 10월 28일 홋카이도 후생연금회관 10월 29일 무로란 신니폰제철 체육관 10월 31일 아사히카와 시민문화회관 11월 4일 야마나시현립현민문화홀 11월 8일 오카자키 시민회관 11월 9일 쿠와나 시민회관 11월 11일 지바현 문화회관 11월 14일 히로시마 우편저금회관 11월 15일 방후 시 공회당 11월 17일 시마네현민회관 11월 19일 가고시마현 문화센터 11월 21일 오이타 문화회관 11월 22일 미야자키 시민회관 11월 24일 구마모토 시민회관 11월 25일 나가사키 시 공회당 11월 29일 나가노현 현민문화회관 12월 1일 도야마 시 공회당 12월 2일 후쿠이 시 문화회관 12월 3일 가나자와 시 관광회관 12월 8일 후쿠시마현 문화센터 12월 9일 야마가타현 현민회관 12월 11일 아키타현민회관 12월 12일 이와테현민회관 12월 13일 아오모리 시 문화회관 12월 15일 군마현민회관 12월 16일 우쓰노미야 시 문화회관 12월 19일 마쓰야마 시민회관 12월 20일 다카마쓰 시민회관 12월 21일 고치현립현민문화홀 12월 24일 교토 회관 12월 25일 고베 국제회관 1984년 1월 9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10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12일 구라시키 시민회관 1월 13일 구라시키 시민회관 1월 16일 니가타현민회관 1월 17일 니가타현민회관 1월 19일 미야기현민회관 1월 20일 미야기현민회관 1월 23일 아이치현 체육관 1월 24일 아이치현 체육관 1월 27일 오사카성 홀 1월 28일 오사카성 홀 1월 30일 일본무도관 1월 31일 일본무도관 2월 1일 일본무도관
1984년 10월 25일 가나가와현민홀 10월 26일 가나가와현민홀 10월 30일 우쓰노미야 시 문화회관 10월 31일 군마현민회관 11월 2일 선시티 고시가야 시민홀 11월 5일 킷타미 시민회관 11월 6일 아사히카와 시민문화회관 11월 8일 쿠시로 시민문화회관 11월 13일 아오모리 시 문화회관 11월 14일 아키타현민회관 11월 16일 이와테현민회관 11월 20일 가고시마현 문화센터 11월 21일 구마모토 시민회관 11월 23일 미야자키 시민회관 11월 24일 오이타 문화회관 11월 26일 시마네현민회관 11월 27일 구라시키 시민회관 11월 28일 교토 회관 11월 30일 시즈오카 시민문화회관 12월 1일 도요하시 근로복지회관 12월 2일 요카이치 시 문화회관 12월 4일 야마가타현 현민회관 12월 5일 구루메 시민문화센터 12월 8일 고베 국제회관 12월 10일 마쓰야마 시민회관 12월 11일 고치현립현민문화홀 12월 13일 다카마쓰 시민회관 12월 14일 나루토 시 문화회관 12월 17일 지바현 문화회관 12월 19일 하치오지 시민회관 12월 20일 야마나시현립현민문화홀 12월 21일 나가노현 현민문화회관 12월 23일 구로베 시 YKK 체육관 12월 24일 가나자와 시 관광회관 12월 25일 후쿠이 시 문화회관 1985년 1월 8일 도쿠야마 시 문화회관 1월 9일 히로시마 우편저금회관 1월 10일 히로시마 우편저금회관 1월 12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13일 후쿠오카 선 팔레스 1월 16일 홋카이도 후생연금회관 1월 17일 홋카이도 후생연금회관 1월 19일 오사카성 홀 1월 20일 오사카성 홀 1월 22일 아이치현 체육관 1월 23일 아이치현 체육관 1월 29일 센다이 시 체육관 1월 31일 니가타현민회관 2월 1일 니가타현민회관 2월 4일 일본무도관 2월 5일 일본무도관 2월 6일 일본무도관
7월 26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7월 27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7월 28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7월 30일 나가오카 뉴타운 공원 7월 31일 나가오카 뉴타운 공원 8월 6일 마코마나이 야외 경기장 8월 7일 마코마나이 야외 경기장 8월 13일 이즈미 파크타운 스포츠 가든 8월 14일 이즈미 파크타운 스포츠 가든 8월 21일 에히메현 종합 운동공원 육상 경기장 8월 27일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 야외극장 8월 28일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 야외극장 9월 3일 오사카 구장 9월 4일 오사카 구장 9월 5일 오사카 구장 9월 10일 코마키시 종합 운동장 야구장 9월 11일 코마키시 종합 운동장 야구장 9월 17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9월 18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9월 19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2월 28일 요코하마 아레나 3월 1일 요코하마 아레나 3월 3일 요코하마 아레나 3월 4일 요코하마 아레나 3월 7일 센다이 시 체육관 3월 8일 센다이 시 체육관 3월 10일 니가타 시 산업 진흥 센터 3월 11일 니가타 시 산업 진흥 센터 3월 14일 나고야 시 종합 체육관 레인보우 홀 3월 15일 나고야 시 종합 체육관 레인보우 홀 3월 17일 나고야 시 종합 체육관 레인보우 홀 3월 18일 나고야 시 종합 체육관 레인보우 홀 3월 22일 오사카성 홀 3월 23일 오사카성 홀 3월 24일 오사카성 홀 3월 31일 키타큐슈 시립 종합 체육관 4월 1일 키타큐슈 시립 종합 체육관 4월 6일 히로시마 썬플라자 4월 7일 히로시마 썬플라자 4월 12일 에히메현 현민 문화회관 4월 13일 에히메현 현민 문화회관 4월 21일 마코마나이 실내 경기장 4월 22일 마코마나이 실내 경기장 4월 25일 일본무도관 4월 26일 일본무도관 4월 27일 일본무도관 4월 28일 일본무도관
8월 14일 나고야 구장 8월 15일 나고야 구장 8월 20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8월 21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8월 22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8월 25일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8월 26일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8월 30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8월 31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9월 1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NTT 도코모 프레젠츠 사잔 올 스타즈 콘서트 투어 "노래하는 일본 시리즈 1992~1993"
전 40공연
1992년 10월 14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10월 15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10월 17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10월 18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10월 23일 마코마나이 실내경기장 10월 24일 마코마나이 실내경기장 10월 25일 마코마나이 실내경기장 10월 30일 가나자와 실천윤리기념회관 10월 31일 가나자와 실천윤리기념회관 11월 7일 오사카성 홀 11월 8일 오사카성 홀 11월 11일 나고야시 종합체육관 레인보우홀 11월 12일 나고야시 종합체육관 레인보우홀 11월 18일 하마마쓰 아레나 11월 19일 하마마쓰 아레나 11월 25일 히로시마 썬플라자 11월 26일 히로시마 썬플라자 12월 1일 니가타시 산업진흥센터 12월 2일 니가타시 산업진흥센터 12월 8일 에히메현 현민문화회관 12월 9일 에히메현 현민문화회관 12월 10일 에히메현 현민문화회관 12월 22일 후쿠오카 국제센터 12월 23일 후쿠오카 국제센터 12월 26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27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29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30일 요코하마 아레나 1993년 1월 12일 센다이시 체육관 1월 13일 센다이시 체육관 1월 20일 나고야시 종합체육관 레인보우홀 1월 21일 나고야시 종합체육관 레인보우홀 1월 23일 나고야시 종합체육관 레인보우홀 1월 24일 나고야시 종합체육관 레인보우홀 1월 29일 오사카성 홀 1월 30일 오사카성 홀 1월 31일 오사카성 홀 2월 3일 일본무도관 2월 4일 일본무도관 2월 5일 일본무도관
1993년 12월 11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13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14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25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26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28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29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31일 요코하마 아레나 1994년 1월 2일 요코하마 아레나[주석 79] 1월 3일 요코하마 아레나[주석 79] 1월 5일 요코하마 아레나[주석 79] 1월 6일 요코하마 아레나[주석 79]
8월 4일 츠마코이 다목적 광장 8월 10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8월 11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8월 17일 마코마나이 야외경기장 8월 18일 마코마나이 야외경기장 8월 24일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 야외극장 8월 25일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 야외극장 9월 6일 나고야 구장 9월 7일 나고야 구장 9월 15일 한신 고시엔 구장 9월 16일 한신 고시엔 구장 9월 21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10월 2일 기노완 해변공원 야외극장 10월 3일 기노완 해변공원 야외극장 10월 12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주석 80]
SOUTHERN ALL STARS 1996 연말 라이브 인 요코하마 아레나 「소」
전 3공연
12월 28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30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31일 요코하마 아레나
8월 8일 하마나호 벤텐지마 해변공원 나기사엔 8월 9일 하마나호 벤텐지마 해변공원 나기사엔
1999년
미쓰비시 전기 DIGITAL FESTA 사잔 올 스타즈 1999 「SeOnoLujanaQuites 〜멋진 봄날의 만남〜」
전 22공연
3월 24일 미야기현 종합운동공원 종합체육관 3월 25일 미야기현 종합운동공원 종합체육관 3월 29일 요코하마 아레나 3월 30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1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2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6일 마코마나이 실내경기장 4월 7일 마코마나이 실내경기장 4월 14일 도쿠시마현립 산업관광교류센터 4월 15일 도쿠시마현립 산업관광교류센터 4월 21일 히로시마현립 종합체육관 그린아레나 4월 22일 히로시마현립 종합체육관 그린아레나 4월 29일 이시카와현 산업전시관 4호관 4월 30일 이시카와현 산업전시관 4호관 5월 8일 후쿠오카 돔 5월 9일 후쿠오카 돔 5월 15일 나고야 돔 5월 16일 나고야 돔 5월 22일 오사카 돔 5월 23일 오사카 돔 5월 26일 도쿄 돔 5월 27일 도쿄 돔
10월 13일 히로시마 문화학원 HBG홀 10월 15일 에히메현 현민문화회관 10월 16일 에히메현 현민문화회관 10월 20일 니가타현민회관 10월 21일 니가타현민회관 10월 24일 아오모리시 문화회관 10월 29일 미야기현 종합운동공원 종합체육관 10월 30일 미야기현 종합운동공원 종합체육관 11월 12일 나고야 돔 11월 13일 나고야 돔 11월 19일 후쿠오카 야후! 재팬 돔 11월 20일 후쿠오카 야후! 재팬 돔 12월 1일 도쿄 돔 12월 2일 도쿄 돔 12월 4일 도쿄 돔 12월 10일 오사카 돔 12월 11일 오사카 돔 12월 17일 삿포로 돔 12월 18일 삿포로 돔 12월 30일 요코하마 아레나 12월 31일 요코하마 아레나
8월 10일 닛산 스타디움 8월 11일 닛산 스타디움 8월 17일 고베 종합운동공원 유니버 기념경기장 8월 18일 고베 종합운동공원 유니버 기념경기장 8월 31일 카야가사키 공원 야구장 9월 1일 카야가사키 공원 야구장 9월 7일 도요타 스타디움 9월 8일 도요타 스타디움 9월 22일 미야기 스타디움
4월 11일 에히메현 무도관 4월 12일 에히메현 무도관 4월 18일 세키스이하임 슈퍼 아레나 4월 19일 세키스이하임 슈퍼 아레나 4월 25일 히로시마 현립 종합 체육관 그린 아레나 4월 26일 히로시마 현립 종합 체육관 그린 아레나 5월 2일 토키 메세 5월 3일 토키 메세 5월 16일 교세라 돔 오사카 5월 17일 교세라 돔 오사카 5월 23일 도쿄 돔 5월 24일 도쿄 돔 5월 26일 도쿄 돔 6월 6일 삿포로 돔 6월 7일 삿포로 돔 6월 13일 나고야 돔 6월 14일 나고야 돔 7월 4일 후쿠오카 야후오쿠!돔 7월 5일 후쿠오카 야후오쿠!돔 7월 19일 오키나와 컨벤션 센터 7월 20일 오키나와 컨벤션 센터 8월 17일 일본무도관[주석 82] 8월 18일 일본무도관[주석 82]
3월 30일 세키스이하임 슈퍼 아레나 3월 31일 세키스이하임 슈퍼 아레나 4월 4일 히로시마 샘플라자홀 4월 5일 히로시마 샘플라자홀 4월 13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14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20일 에히메현 무도관 4월 21일 에히메현 무도관 4월 27일 샌드돔 후쿠이 4월 28일 샌드돔 후쿠이 5월 11일 멧라이프 돔 5월 12일 멧라이프 돔 5월 18일 후쿠오카 야후오쿠!돔 5월 19일 후쿠오카 야후오쿠!돔 5월 25일 교세라 돔 오사카 5월 26일 교세라 돔 오사카 6월 1일 나고야 돔 6월 2일 나고야 돔 6월 8일 삿포로 돔 6월 9일 삿포로 돔 6월 15일 도쿄 돔 6월 16일 도쿄 돔
2020년
사잔 올 스타즈 특별 라이브 2020 「Keep Smilin' 〜여러분, 감사합니다!!〜」
6월 25일 요코하마 아레나 (온라인 라이브)
사잔 올 스타즈 거의 연말 라이브 2020 「Keep Smilin'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폭풍을 부르는 맘피!!〜」 후원: SOMPO 그룹
9월 27일 카야가사키 공원 야구장 9월 28일 카야가사키 공원 야구장 9월 30일 카야가사키 공원 야구장 10월 1일 카야가사키 공원 야구장
2025년
사잔 올 스타즈 LIVE TOUR 2025 「THANK YOU SO MUCH!!」 제공: 유니클로
총 26회 공연
1월 11일 이시카와현 산업전시관 4호관 1월 12일 이시카와현 산업전시관 4호관 1월 22일 히로시마 샘플라자홀 1월 23일 히로시마 샘플라자홀 1월 28일 고베 월드 기념홀 1월 29일 고베 월드 기념홀 2월 8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2월 9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2월 19일 미야기・세키스이하임 슈퍼 아레나 2월 20일 미야기・세키스이하임 슈퍼 아레나 3월 1일 아나부키 아레나 가가와 3월 2일 아나부키 아레나 가가와 3월 15일 오키나와 아레나 3월 16일 오키나와 아레나 4월 2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3일 요코하마 아레나 4월 12일 미즈호 페이페이 돔 후쿠오카 4월 13일 미즈호 페이페이 돔 후쿠오카 4월 23일 반테린 돔 나고야 4월 24일 반테린 돔 나고야 5월 10일 다이와 하우스 프레미스트 돔 (삿포로 돔) 5월 11일 다이와 하우스 프레미스트 돔 (삿포로 돔) 5월 17일 교세라 돔 오사카 5월 18일 교세라 돔 오사카 5월 28일 도쿄 돔 5월 29일 도쿄 돔
^ ab「평화와 하이라이트」「도쿄 빅토리」등[34][35]. 구와타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 「구와타 게이스케의 상냥한 밤놀이」에서도 “일본 국민 여러분은 멋지고 상냥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평화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희망의 싹을 심어가자, 지상에 사랑을 심어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120][121]. 또한, 2014년 가을 구와타가 자수포장을 수상했다는 보도가 있었을 때는 “일본과 세계가 평화롭기를”이라고 코멘트했다[122].
^재일 한국인을 주제로 한 곡 "LOVE KOREA" 발표 당시 구와타 게이스케를 재일로 오인하는 등의 루머가 퍼졌다[233][232]. 구와타는 일본인이며, 2021년 저서 '팝스 가수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 속 원작자의 후기 '아내의 일기'에 정확한 출신이 기록되어 있다[234].
^특히 납치 문제를 언급한 " 만화 드림 07"에서는 "국교 정상화 같은 미담으로 사실을 잊게 하지 마라" [262], 위구르에서의 사건을 언급한 "만화 드림 09"에서는 "그 나라의 통제와 탄압 아래 눈물 넘치는 민족(탐)", "'신장'이라는 의미[주석 35]…이것조차 이상하지 않아!?" 등이라고 노래하고 있다[264].
^AKB48은 "천국 온 더 비치" MV에도 등장하지만, 한편 구와타는 AKB48에게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289][290].
^일례로, 사잔이 중요한 이벤트에서 항상 비를 만났던 기억 때문에 "40년간, 비 밴드입니다"라고 자학 개그를 한 적이 있다[293].
^2004년에 열린 연말 라이브 '저녁의 사나카'에서 구와타가 구도 슌사쿠, 세키구치가 탄게 사젠을 연기한 '탐정 이야기' 패러디 코미디가 상영되거나[294], 2020년 무관객 연말 라이브 'Keep Smilin’〜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폭풍을 부르는 맘피!!〜'에서 거실 세트에서 코타츠를 둘러싼 사잔 멤버들의 영상이 등장해 "마치 자 도리후타즈 코미디 같다"고 평가받는 등 하고 있다[295].
^구와타는 "올해 최대 히트곡입니다"라고 서두를 꺼낸 뒤 "함께 불러주세요"라고 속삭이며 어쿠스틱 기타 하나로 원곡에 충실하게 연주·가창했고, 관객들도 함께 가창하여 장소가 하나 되는 국가 제창이 되었다[298][299]. 또한 9월 27일 공연 연주 후에는 "좋은 곡이지만, 편곡이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칼럼이었습니다"라고 '다사쟁론' 패러디 개그를 넣고 있다[298].
^구와타는 후년에도 라디오 프로그램 "구와타 게이스케의 상냥한 밤놀이"(TOKYO FM) 2010년 5월 29일 방송분 생방송 코너에서 독창하고 있다[300]. 또한, 2014년 11월 14일 자수포장을 수상했을 당시 전달식에서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가창하는 모습이 보도된 적이 있다[301].
^판매 매수는 각각 8.7만 장, 5.5만 장, 9.8만 장, 3.7만 장, 3.4만 장이며 "이토시노 엘리"의 히트와 비교하면 부진했다[335].
^평판을 받아, 1981년 4월 사잔 멤버 중 처음으로 원이 " I Love You는 혼잣말"로 솔로 데뷔를 했고, 프로듀스는 구와타가 담당하고 있다[322].
^동 앨범부터 7번째 앨범 ' 인기자로 가자'까지 4장 연속으로 매년 7월에 발매되었다[338].
^이 무렵부터 사잔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보다 소비자가 원하는 음악에 맞춰 음악 제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339].
^구와타 게이스케의 미나미 하루오를 모티브로 한 퍼포먼스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342][343]. 하지만 현장 반응은 좋았고, 점수 집계 코너에서 구와타와 미나미가 나란히 서자 관객석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으며, 미나미 본인도 이 퍼포먼스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구와타의 예술에 대한 진지함과 인품을 칭찬하는 코멘트를 남겼다[344].
^2006년 THE 무진토 Fes.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사잔으로서의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기간을 활동 휴지 기간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사잔 부활의 계기는 그 외에도, 동일본 대진재 피해자들로부터 ‘미야기 라이브’ 개최 시기 전후로 "사잔의 노래를 듣고 힘을 얻었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구와타 씨도 병으로 힘드셨죠. 저희는 사잔을 기다리고 있으니 무리하지 마세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습니다"와 같은 편지가 많이 도착한 것도 영향을 미쳤고, 구와타는 "감사하면서 동시에 힘이 난다.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82].
^세라 마사노리 & 트위스트는 사잔과 같은 시기인 1978년경에 인기가 급상승하여, 2대 붐을 일으켰고,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여자는 트위스트파, 남자는 사잔파로 나뉘는 등 인기를 양분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사잔 팬임을 공언하는 우치무라 테루요시(웃짱난짱)가 증언하고 있다[472].
^“연말 라이브”라고 불리는 카운트다운 라이브는, 12월 31일 공연만 요코하마 아레나가 있는 가나가와현의 조례에 따라 18세 미만의 입장이 금지되어 있다. 예전에는 20세 이상 보호자 동반의 경우만 허용되었지만, 2007년부터의 조례 개정으로 입장이 완전히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