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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타츠로(やました たつろう, 영어: Tatsuro Yamashita[주석 1], 1953년〈쇼와 시대 28년〉2월 4일 - )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뮤지션이다. 일본에서의 예전 애칭은 야마타츠[11][12][13][14]이다.
야마시타 타츠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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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야마시타 타츠로 |
생년월일 | 1953년2월 4일 (71세)[1] |
출신지 |
![]()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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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
직업 | |
담당 악기 | |
활동 기간 | 1973년 | -
레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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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타케우치 마리야(결혼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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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 | |
공동 작업자 | |
공식 웹사이트 | 야마시타 타츠로 공식 사이트 |
주요 사용 악기 | |
펜더 텔레캐스터 |
도쿄도도시마구이케부쿠로 출생. 아내는 싱어송라이터 타케우치 마리야이다.
소속 음반사는 워너 뮤직 재팬[15]. 소속사는 스마일 컴퍼니[7]와 아내와 공동 경영하는 개인 사무소(저작권 관리용) 텐더베리 & 앤드 하베스트(야마시타 측의 회사[주석 2]는 텐더베리 뮤직 주식회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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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보이스 매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비치 보이스에 정통하며, 야마시타 자신에게 영향을 준 것은 대부분 브라이언 윌슨과 비치 보이스와 같은 아메리칸 팝스 록 뮤지션들로, 자신의 앨범에도 비치 보이스의 커버곡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두왑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으로, 조예가 깊다. 자신의 보컬을 다중 녹음하는 “1인 아카펠라”라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마시타는 그 외 소프트 록, 블루아이드 소울, 코러스 그룹, 스윗 소울 등의 팬이기도 하다. 제임스 브라운이나 가라지 록도 좋아하는 등, 음악 취향은 폭넓다. 참고로, 하기와라 켄타와 함께 일본에서 비치 보이스 팬의 대표격이다.
음악 제작에 대한 고집과 독자적인 제작 자세 때문에 “소리의 장인”이라고도 불린다[17][18]. 레코딩에서는 보컬·백 코러스는 물론, 편곡부터 기타, 컴퓨터 입력, 신시사이저, 퍼커션까지 혼자서 담당한다. 모든 연주를 혼자서 하고 있는 곡도 있다. 특히 기타의 리듬 카팅에 능숙하다[주석 3]. 어쿠스틱 감이 강한 작풍을 특징으로 하지만,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방침이기 때문에 아날로그부터 디지털까지 커버하는 폭넓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오오누키 타에코 등과 함께 슈가 베이브를 결성하여, 앨범 『SONGS』(1975년)으로 데뷔했다. 프로듀스를 맡은 오타키 에이이치의 나이아가라 레이블에서는, 일본 컬럼비아 시대의 작품에 코러스나 스트링스 어레인지로 참가했다. 특히 오타키의 솔로 앨범 『NIAGARA MOON』(1975년)이나 『NIAGARA CALENDAR』(1977년)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주석 4]. 또한, 자신의 작품 제작과 함께 1975년경부터 다른 싱어, 뮤지션에게 곡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고스기 리우조를 통해 자니스 사무소와의 관계도 있으며, 콘도 마사히코의 「하이틴 부기」(1982년), 킨키 키즈의 데뷔 싱글 「유리의 소년」(1997년)이나 「제트 코스터 로맨스」(1998년)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니스 소속 탤런트 출연 작품의 주제가도 많이 담당하고 있다.
오타키와 마찬가지로 레코드·CD 수집가, 오디오 매니아이며, 특히 록·R&B·팝스에 대한 조예가 깊고, 아날로그 음반은 오리지널을 중심으로 수집하고 있으며, 소장 총수는 6만 장을 넘는다[20].
해외에서는 작품 발매를 하지 않았지만, 2010년대의 베이퍼웨이브 붐으로 작품이 발굴되어 퍼져나갔다. 참고로, 야마시타 타츠로가 백 트랙을 제작한 타케우치 마리야 작의 「플라스틱 러브」는 비공식 영상이지만 해외 리스너를 중심으로 유튜브에서 총 1억 회 이상 재생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재패니즈 시티 팝」」 참조).
“텔레비전이나 DVD·블루레이 소프트웨어 등의 얼굴을 드러낸 출연은 하지 않는다”“일본 무도관과 같은 대규모 아레나급 회장에서의 콘서트는 하지 않는다”“저서를 쓰지 않는다”의 세 가지 고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아내인 타케우치 마리야의 라이브 영상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으며[21], 기타를 치는 야마시타를 볼 수 있다.
야마시타는 얼굴로 인기를 얻는 것보다 노래를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 무대 위에서 모든 청중에게 높은 퀄리티의 음악을 전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콘서트홀 이외의 대규모 체육관이나 아레나급 장소에서는 그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레나급 장소에서의 공연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나카노 선플라자 대홀(수용 인원 2222명)은 “맨 뒷자리 청중에게도 연주가 제대로 들린다”고 하여 오랫동안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아내인 타케우치 마리야의 콘서트 투어[주석 5]에 대해서는 일본무도관이나 오사카성 홀 등 아레나급 공연장에서 라이브를 하고 있으며, 2010년 이후로는 “라이징 선 록 페스티벌”이나 “키시단 만박” 등 야외 페스티벌 출연도 늘고 있다.
또한 뮤지션으로서의 신념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이유로 솔로 활동 이후로는 TV 출연도 원칙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실제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는다(슈가 베이브 시절에는 약간 TV 출연을 했다). 단, 목소리만 출연하거나 인터뷰 장면의 정지 화면 방영은 허용하고 있으며, NHK ‘SONGS’나 후지TV ‘메자마시 TV’, 니혼TV ‘ZIP!’, 일본영화전문채널 ‘일요일 일본영화극장’[22], TV 아사히 ‘칸쟈무 완전연소 SHOW’[23][24] 등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제73회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KinKi Kids의 무대에 깜짝 메시지 음성을 보내 음성만으로 홍백가합전에 첫 출연했다.
자신의 저서(자서전, 에세이 등)도 일절 집필하지 않았다.[25] 다만, ‘ON THE STREET CORNER’ 이후 자신의 앨범이나 비치 보이스 등 자신과 관련이 깊은 앨범, 그리고 야마시타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워너뮤직재팬 발행의 일련의 “워너 나겟츠 시리즈(팝록 나겟츠, 걸즈팝 나겟츠, 두업 나겟츠 등)”에서는 그에 대한 작품 해설 및 라이너 노트를 맡고 있다. 그 외, 잡지 ‘레코드 컬렉터스’의 “나의 수확”에도 컬렉터 중 한 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라이브 중 수분 보충에는 어떤 미네랄워터를 마시는가?”라는 청취자의 질문에 가고시마의 “자이호 온천”이라고 답했다. 이유는 옛날 미네랄워터는 1L밖에 없었을 때 500ml로 나왔기 때문에 라이브 중에 1L를 다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자이호 온천”을 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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