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무로 테츠야(こむろ てつや, 1958년〈쇼와 33년〉11월 27일[3] - )는 일본의 뮤지션·음악 프로듀서·키보디스트이다. 도쿄도 후추시 출신.
코무로 테츠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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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재팬 2014」에서 | |
기본 정보 | |
별명 |
TK t[주석 1] t.komuro[주석 2] TECHI KOMURO[주석 3] TETSUYA KOMURO[주석 4] Tetsuya Komuro Tetsuya_Komuro[주석 5] TETSUYA "TK" KOMURO[주석 6] 566[주석 7] DJ TK[주석 8] t.tek 2[주석 9] TAN DK[주석 10] Lifecell[주석 11] Digital "Cheap" Snake[1] 슈퍼웨이브 코무로[주석 12] |
생년월일 | 1958년11월 27일(66세)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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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와세다대학 사회과학부 중퇴[2] |
장르 | |
직업 | |
담당 악기 | |
활동 기간 |
1975년 - 2018년 2019년 - |
레이블 |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에픽/소니 레코드 /안티노스 레코드 /TRUE KiSS DiSC (1984 - 2000) 에이벡스 그룹 /에이벡스 트랙스 /에이벡스 글로브 (1991 - ) 파이오니아 LDC /ORUMOK RECORDS /factoryorumok Tatsumaki Records (1995 - 2001) 포니 캐년 /FLIGHT MASTER (1998 - 2001) R and C gaball screen (2001 - 2007) Syn Songs (2006 - 2018) Pavilions Record (2021 - ) |
사무소 |
준 & 케이 (1975- 1994) 오피스 타임머신 (1983 - 1994) 오페라 기그 ↓ TK 스테이트 /TK 뮤지엄 /TK 스테이트 아메리카 뮤지엄 /TK 시퀀스 /TK 시퀀스 아메리카 /TK 엔터테인먼트 서브 /프라임 디렉션 TK 룸 /테츠야 코무로 라이즈 (1992 - 2000) 안티노스 매니지먼트 /안티노스 뮤직 (1993 - 2000) 로잠 엔터테인먼트 (1998 - 2004) 요시모토 흥업 (2001 - 2007) 트라이벌 킥스 (2004 - 2007) TK컴 /엠파이어 플레이 뮤직 /이 뮤직 (2007 - 2008) 에이벡스 매니지먼트 (2009 - 2018) 어 나인 ↓ 파빌리온스 /사운드 포트 (2009 - ) 뮤직 디자인 (2020) |
공식 사이트 | 에이벡스 공식 사이트 |
주요 사용 악기 | |
롤랜드 TR-808 / TR-909 야마하 KX5 / 테츠야 코무로의 마인드 컨트롤 야마하 DX7 / DX7II-FD / DX7II-D 이뮤 에뮬레이터 II EOS B200 / B500 / B700 싱클라비어 6400 엔소닉 VFX 롤랜드 JD-800 팬텀-G6 / G7 / G8 클라비아・노드 리드 3 액세스 바이러스・바이러스 인디고 2 레드백 / 바이러스 TI2 폴라 |
3세부터 12세까지 도쿄 예술대학 교수 밑에서 바이올린 클래식 음악 연습곡을 연주하는 레슨을 통해 음감의 기초를 배운다. 초등학생 때부터 클래식 음악의 연주곡을 만들었다[7][8][9]. 같은 시기에 건반 악기는 배우지 않았고, 그 당시 영향으로 후에 “건반 악기를 칠 때 손이 퍼덕거린다”는 피아노를 칠 때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버릇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일부러 평평하게 함으로써, 옥타브 주법이 쉽게 할 수 있게 되고, 건반 악기로 베이스의 슬랩 주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10].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일렉톤을 구입한다. 이것이 건반 악기와의 만남이 된다. 어머니보다 먼저 코드를 익히고, 10일 만에 기본 조작을 마스터하여 일렉톤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같은 무렵, 외삼촌에게서 기타 코드를 배우고, 마스터하는 속도가 빨라 삼촌을 놀라게 했다[8][11]. 연습할 때 펠릭스 멘델스존의 멜로디의 시원함, BPM의 비정상적인 속도[12], 클래식 음악 연습곡의 아이도 지루해하지 않는 약간의 변화가 고려된 구성[9]에 영향을 받았다. 피아노는 독학이며, 중학교 2학년 때 음악 수업에서 기타를 선택하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일부러 피아노를 선택하여 치기 시작했다[13]. 프로 건반 연주자로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임하고,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이후였다[14]. 그러나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후에 “화음·오케스트레이션을 전제로 한 발상”보다 “주선율은 하나뿐, 단음을 눈에 띄게 하는 구성”이라는 기본이 코무로 안에서 만들어졌다[9].
음악 시간에 50분 동안 16마디를 악보에 쓰는 작곡 시험이 있었을 때, 선생님이 코무로의 작품을 평가하고, 그 곡을 다른 반 친구들이 리코더로 불었다. 코무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매우 싫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15][16][17]. 1970년 세계 박람회에서 신시사이저·매니퓰레이터·다중 모니터·12채널 스테레오를 배경으로 연주하는 토미타 이사오를 가까이서 보고, “만약 모차르트 시대와 같은 악기밖에 없었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승부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후술할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18][19].
중학생 때 신시사이저를 갖고 싶어서 집에 있던 기타·바이올린·일렉톤을 가족 몰래 팔고, 당시 16만 엔이 넘었다는 신시사이저 「롤랜드SH1000」을 샀다. 가족에게 혼났지만, 「당시 신시사이저는 일렉톤보다 음색도 제한적이고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잘하는 것이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계기로 다시 연습을 계속하면서 오리지널 음악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와타나베 미사토의 「키미니 아에테」「BELIEVE」「아라시가오카」「I wish」·TM NETWORK의 「Here, There & Everywhere (겨울의 신화)」 등 나중에 제공하는 곡의 밑그림 약 20곡을 그 무렵 작곡했다[8][20][21][22].
와세다 지츠교가쿠 고등부상업과에 입학했다. 코무로의 작곡 테크닉이 반 친구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반 친구 절반 이상의 작곡 숙제를 대신 해주었다. 음악 담당 선생님은 코무로가 졸업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23]. 이 무렵부터 ELP·핑크 플로이드·레드 제플린·킹 크림슨·T.Rex[주석 19]·유라이어 힙·코모도스·Kool & the Gang·Earth, Wind & Fire·도나 서머·딥 퍼플·Yes 등의 서양 음악을 프로그레시브 록[주석 20]·펑크를 중심으로 듣게 되었다[26][27]. 그중에서 영향을 받은 뮤지션으로 키스 에머슨·릭 웨이크먼·존 로드·키스 자렛·조 샘플·데이브 그루신 등 재즈계 피아니스트를 들 수 있으며, 특히 키스 에머슨[주석 21]·키스 자렛[주석 22]에 대해서는 즉흥 연주를 중심으로 하는 자세에 감명을 받았다. 신주쿠의 록 카페에 매일 드나들며 팬으로서 미니 코믹지 「록 보텀」에 참가하여 앨범 감상과 평론을 썼다[28].
와세다 대학 사회과학부[2]에 진학하여 5년 정도 재학 중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주석 23]. 처음으로 현금으로 받은 보증채무는 18세 때 댄스 파티의 백 밴드에서 키보드를 담당했을 때의 연주료로 5천 엔이었다[31]. 뮤지션으로서의 실력은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로 서툴렀지만, 「신시사이저를 사용하는 드문 뮤지션」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 스카우트·세션·레코딩 참가 요청으로 이어졌다[28]. 대학 강의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통계학은 재미있게 느껴서 반드시 출석했고,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할지를 리서치·계산해서 생각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32]. 그 후에도 음악 활동에 몰두하여 수업료를 악기 값으로 돌려 쓰는 바람에 학점을 못 따서, 코무로도 「수업료를 내느니 신시사이저를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적되었다[33].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해야 하는 건가」하고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음악 잡지 「Player」 당시 편집장의 소개로 몇몇 레코드 회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의 백 밴드·스튜디오 뮤지션을 맡고, 데뷔 전 TM 멤버·스태프의 매니지먼트도 맡아 콘테스트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1982년에는 장비 운반을 위한 자가용을 팔아서까지 새로운 장비를 준비하고, 각계에 여러 데모 테이프를 응모했다. 당시 지향은 조르조 모로더[주석 24]·ELO·버글스와 같은 「테크노 팝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어디까지나 대중음악의 분위기를 지키고, 어떻게 고급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도 잘 댄스 음악의 음색을 만들까」를 생각하면서 세심하게 제작하고 있었다[35]. 그렇게 하면서 데모 테이프가 고사카 요지·고바야시 카즈유키의 눈에 띄었고[36], 본격적으로 TM NETWORK 데뷔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16].
자신의 음악 유닛인 TM NETWORK(후에 TMN)와 병행하여, 미우라 노리코의 권유와 미우라의 소개로 알게 된 와타나베 유조의 추천[37]、「가끔 다른 사람의 곡을 만드는 것도 공부가 된다」는 이마노 빈의 격려[38]로 오카다 유키코의 「Sweet Planet」「물색 프린세스 ―물의 요정―」을 시작으로, 와타나베 미사토, 이토 카즈에, 야기 사오리, 오기노메 요코, 오냥코 클럽의 후쿠나가 에키, 호리 치에미, 나카야마 미호, 마츠다 세이코, 코이즈미 쿄코, 이마이 유코, 미야자와 리에, 미즈키 아리사, 마키세 리호, 나카모리 아키나 등에게 곡을 제공하며, 작곡가로서도 활약한다. 그 활동은 TM NETWORK 및 솔로 활동 시 기획·제작비·프로모션 환경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당시 공동으로 작업할 기회가 많았던 오오무라 마사로에 대해 코무로는 「내가 제시하려 했던 새로움을 가장 잘 이해해줬다. 그 위에서 다른 가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어떻게 프레이즈와 코드 진행을 어레인지하면 히트할지 생각할 때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21][39]. 그 활동은 결국 잡지·신문에 「TM의 코무로 테츠야가 작곡」이라는 형태로 TM의 홍보로 나타나, 이후 작곡가로서 코무로의 활동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40].
1986년(쇼와 61년)에 와타나베 미사토에게 제공한 「My Revolution」이 제28회 일본 레코드 대상 금상을 수상한다. TM NETWORK는 1987년에 발표한 「Get Wild」로 단숨에 인기 밴드가 되고, 1988년에는 제39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전한다. 하지만 코무로는 「왜 'Get Wild'가 1위가 아닌가」라며 분해했고, 그 이후로 레코드 회사와 함께 다른 인기 아티스트와 발매일이 겹치지 않도록 스케줄을 직접 조정하게 된다[41].
1988년 초봄부터 「CAROL 〜A DAY IN A GIRL'S LIFE 1991〜」등의 제작과 해외 동향을 살피고, 최신 음원에 직접 접촉하기 위해 코무로 혼자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조건[42]으로 런던으로 건너가, 반년 정도 아파트에서 지냈다[주석 25]. 방에 놓은 CP-80으로 곡을 만들고, 톰슨 트윈스의 프라이빗 스튜디오에 다녀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그것을 교외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완성하는 등 현지 뮤지션과 같은 스타일로 제작 활동을 반복했다[45]. 혹시 현지에서 여성 보컬리스트를 스카우트하여 「TM international」이라는 TM의 자매 유닛을 결성·세계 데뷔시켜, 「디스코 앨범」「기존 TM의 곡의 영어 번역판」을 제작·발매할 계획이 있었다[46]가, 카일리 미노그의 1st 앨범 「Kylie」의 판매 규모를 보고, 일본과 해외 시장의 차이가 얼마나 격차가 있는지를 절감하게 된 것[42]・「킥·하이햇이 싱크로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춤출 수 없다」고 현지 뮤지션에게 충고받고,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한 것·유로비트의 프로듀서 집단 PWL(스톡 에이트킨 워터맨)의 일을 가까이서 본 것을 통해 스튜디오 워크의 재미를 알게 된 것[주석 26]·정글의 런던에서의 침투에 충격을 받은 것[주석 27]·일본과의 연락 수단으로 직접 이야기할 때는 국제전화, 기획서 체크에는 팩스, 데모 테이프 배송에는 우편과 용도별로 사용해야 했고, 불필요한 시간과 통신비가 들고, 본래의 일에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에 백지화되었다[52][53]. 이 일을 계기로 그 이후 1년에 최소 1회, 많으면 4~5회는 스튜디오 설계와 기재 연구도 겸하여 런던의 여러 스튜디오에서 레코딩·믹싱 작업을 하게 된다[44][54][55]. 그 외에도 뮤지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쉴 새 없는 몰입감에도 영향을 받고 연구했다[주석 28].
1989년(쇼와 64년/헤이세이 원년)에 싱어송라이터로 솔로 데뷔한다. 리드 보컬을 맡은 「RUNNING TO HORIZON」, 「GRAVITY OF LOVE」가 연속으로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다. 1985년~1992년 사이에는 애니메이션 영화 「흡혈귀 사냥꾼 D」, 실사 영화 「우리들의 7일간 전쟁」, 「하늘과 땅과」, 월 9 드라마 「스무 살의 약속」, 무대 뮤지컬 「마드모아젤 모차르트」의 극중 음악을 담당했다.
1991년경, 마쓰우라 마사토를 만났을 때, 마쓰우라로부터 TM의 음악을 유로비트풍으로 편곡한 리믹스 앨범 「TMN SONG MEETS DISCO STYLE」 기획을 제안받았다. 당시 “TM의 작품은 초판은 매진되지만, 재주문이 발생하지 않아 팬 이외로 음악이 퍼지지 않고, 가라오케나 디스코에서도 와타나베 미사토 씨의 노래만 나온다”는 우려와 체념에서 TM의 고정 팬을 “15만 개의 지우개”라고 비유하게 되었고, 당시 신흥으로 성장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에이벡스의 제안에는 처음에는 주저했다. 하지만 마쓰우라의 “그렇다면 TM의 음악이 나오지 않는 곳을 타겟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절대 촌스럽지 않게 하겠습니다.”, “유럽에서는 하나의 음으로 댄스 플로어가 확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만드는 음악도 재밌습니다.”라는 권유도 있었기에, 1992년부터 자신의 기반 중 하나인 댄스 음악이 “어떻게 하면 그 장르를 좋아하는 고정 팬으로부터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퍼져나갈 수 있을까”를 DJ로서 전국을 돌며 음색과 출연 멤버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오디션 심사위원을 맡고, 스튜디오에서 작곡 활동을 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듭했다[57][58][59][60]. 댄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이유에 대해서는 “가라오케와 디스코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디스코 후에 가라오케에 가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부르는 노래는 사잔 올 스타즈·마츠토야 유미 씨·ZARD처럼 열창해야 하는 형식뿐이어서, 단지 탬버린을 들고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는 것만으로는 무리가 있는 곡이 많았다. 그러니까, 부르거나 춤추거나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즐길 수 있는 곡이 더 있어도 좋다. 저로서는 거기에 시장으로서의 공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20]. 하지만, 1970년대 - 1980년대의 신시사이저로는 어려운 프로그래밍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멜로디와 리듬이 돌아온다”는 패턴을 만들어 반복해야만 했고, “흐름이 유창하고 드라마틱하며 기승전결이 있는 일본 가요”, “오자키 유타카 씨처럼 눈물·땀·감성적인 음악이 명곡”으로 젊은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세상에 대해, 어떻게 하면 반복이 많고 무기질적인 댄스 음악에 록 음악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할 수 있을지, 음악계에 진입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33].
하지만, 고무라가 에이벡스 트랙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을 때, EPIC 내부에서는 “타사 아티스트를 프로듀스하는 것은 계약 위반이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도의적으로는 어떤가”, “EPIC은 록 레이블인데, 댄스는 경박하다”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음악계에서는 “음악 프로듀서는 레코드 회사의 직원·전직 아티스트의 전속 계약”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trf 데뷔 당시, TM의 멤버·솔로 뮤지션으로서의 계약은 계속해서 EPIC과 맺으면서, 음악 프로듀서로서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개인 사무소 “OPERA GIG(후에 TK state로 개명)”를 설립했고, 고무라는 음악에 관한 모든 컨셉을 세웠다. 그것을 원활하게 실행하기 위해, 마루야마 시게오는 “아티스트 주도·레퍼토리 관리에 특화된 연예 기획사”를 컨셉으로 “안티노스 매니지먼트(후의 블루원 뮤직→현 소니 뮤직 아티스츠)”를 설립했고, 고무라는 제1호 계약자가 되었다[주석 29][62]. 그리고 동시에 마루야마가 고무라의 개인 사무소와 프리 계약을 맺고, 에이벡스와의 가교 역할을 했다[63][64]. 형태로서는 “에이벡스에 고무라를 빌려주고 있다”[65], “연주권은 확실히 EPIC 측이 가지고 있지만, 입력된 데이터의 재생은 연주가 아니다”[64]라고 마루야마가 체면을 보장함으로써 계약 문제를 극복했고, 그 대가로 원래 고무라에게 지불되는 활동 수입·인세 중 “원반권으로 발생하는 인세”, “실연자로서의 아티스트 인세”를 마루야마가[64], “에이벡스와의 일로 발생한 고무라의 수입의 몇 %”를 EPIC이 받는[65] 형태를 취했다[주석 30]. “작사·작곡·편곡·프로듀스를 중심으로 한 매출 중 1~5%의 저작권 인세”[44][67], “음악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으로 발생하는 수입”[주석 31], “텔레비전·이벤트 등 출연료”[66]는 고무라의 몫이 되었다.
1993년에 음악 프로듀서로 전념할 결의를 주변에 표명한다. 도쿄·시바의 오피스 빌딩의 층을 통째로 빌리고, 개인용 스튜디오를 3개 건설하고, 오디오 믹싱 전담 스태프를 로스앤젤레스와 런던에 두고, 배송 스태프를 주 2회 정기적으로 오가게 하는 등, 음악 제작을 위한 환경을 갖추고[69], “1993년은 스튜디오에서 음악 제작에 몰두했다”고 회상할 정도로, 음악 스톡을 늘리는 제작 활동에 전념했다[70][주석 32]. 그때의 목표가 된 것은, 더 오브의 작품군·활동 스타일이었고[주석 33], “TM·trf에 공통되는 제가 매우 팝적인 부분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73]. 그때의 상황을 “세상은 이미 일을 분담하여 시스템화해 가는데,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 간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있는 일은 가내수공업과 같다”고 고민을 보였지만[74], 반면 작사·작곡·편곡 중 고무라가 담당하는 작업이 하나뿐이라면 제작에 막히고, 감히 3개를 겸하면 “멜로디와 코드 진행이 같더라도, 음색과 작사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될 수 있다”, “작사에 막혔을 때 코드 진행을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바꿈으로써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편곡을 댄스 음악에서 록으로 간단하게 바꿀 수 있다” 등 일의 조합이 3개 이상 있는 편이 오히려 일하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은 아이디어의 라이브러리가 되고, 아티스트의 캐릭터 색깔 분류에도 연결된다”고 말하고 있다[75].
창작 활동을 하면서 기획서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TM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과 여성 보컬리스트를 위한 곡을 프로듀스적인 측면에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러 1994년 TM 활동 중단을 결심한다. 당시 키워드로 “해산”이 아닌 “종료”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활동 종료 직전까지도 TM의 다음 이미지와 가능성[주석 34]을 발견하고 그것을 존중하기 위해 “어디까지나 제1기 프로젝트 종료”, “뉴스·다큐멘터리·기념건축물로서의 ‘종료’라는 단어의 프로듀스”[78]라는 컨셉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무로가 후에 “아무리 들어도 제멋대로다”라고 회상할 정도의 제안을 받아들여준 우츠노미야와 키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79].
1994년 TMN 종료 전후부터, 미즈키 아리사, 시노하라 료코, TRF, 히토미, 우치다 유키, H Jungle with t, dos, globe, 카하라 토모미, 아무로 나미에 등 다수의 작사, 작곡, 편곡과 음악 프로듀싱을 겸임했다. 1994년부터 1999년 사이에 수많은 밀리언셀러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각종 미디어에서 “코무로 패밀리”, “코무로 사운드”, “코무로 계” 등으로 분류되는, 소년 시절부터 꿈꿔왔던 코무로 붐이라는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마루야마 시게오가 코무로의 프로듀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안티노스 레코드를 설립했고, 매니지먼트 업무도 안티노스 매니지먼트(후의 블루원 뮤직→현 소니 뮤직 아티스츠)와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했다[80][68].
작사가·작곡가로서의 코무로는 음악 출판사 “안티노스 뮤직”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예를 들어, 에이벡스에 소속된 TRF 프로젝트에 코무로가 프로듀서·작사가·작곡가로 참여하면, 프로듀서 수입은 매니지먼트 회사 “안티노스 매니지먼트”에 들어가고, 저작권 인세는 원칙적으로 “안티노스 뮤직”을 거쳐 “안티노스 매니지먼트”에 들어갔다[68].
프로듀스 기법 구축에 있어서는 1980년대에, 입력에 의한 댄스 음악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히트곡을 대량 생산한 스톡 에이트킨 워터맨 레코드 회사를 연쇄점으로 생각하고, 시장의 요구와 노래방에 다니는 팬들의 니즈에 부응하는 소프트웨어를 스스로 제조해 나가는 자세에 대해 “사운드 프로듀서로서 같은 이상과 노하우·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숫자와 퀄리티에 지고 싶지 않다”고 분함을 토로한 B ZONE의 나가토 다이코의 프로듀스 기법[주석 35]·스티븐 스필버그의 제작 현장 매니지먼트 기법[주석 36]을 참고했다고 한다. 실제로 코무로 본인이 J-POP용으로 프로듀스한 곡은, 입력에 의한 댄스 음악을 중심으로 한 명확한 후렴구가 있는 노래였고,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도 이해하기 쉽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80][68][83]. 마츠우라는 “듣자마자 바로 귀에 남는 이해하기 쉬운 프레이즈”를 우선적으로 만들도록 지시했고[60], 그 연장선상에서 뮤지션·엔지니어로서 다양한 실험적인 연출을 했다[84].
1994년부터, EUROGROOVE라는 다국적 멤버로 구성된 유닛을 결성하여 해외 진출을 도모했다. 코무로 붐을 맞아 일본 음악이 세계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현실을 뒤집는 시도로 시작되었지만, 일본 국내에서 엄청난 붐을 일으킨 코무로 본인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1996년에 종료되었다.
1995년부터 4년 연속으로 프로듀싱한 곡이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85]했다. 이 무렵부터 “먼저 TV 프로그램과의 타이업이 있고, 그것을 위한 음악 프로듀싱을 해달라. 부분적으로 봐도 상관없고주석 37, 처음부터 끝까지 봐도 좋다. 아티스트, 발매처, 음색, 곡 순서, 제목도 맡기니 마음대로 해도 좋다. 레코딩 예산, 재킷 사진, PV, 포스터, 홍보 자료, 광고 문구와 취재를 하는 잡지와 방송 등 미디어도 플랜 단계부터 비용을 관리해서, 원고 검토를 해달라. 라이브 내용과 스케줄도 감수해달라. 제작비까지 전부 맡긴다”는 식의 전권 위임 제안이 쇄도하게 되었고[44][49][70][88][89][90], 프로듀서로서 레코드 회사의 마케팅 회의부터 CD샵에서의 세일즈 프로모션까지 관여[91]하며, “상대방의 제안 내용이 알기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제삼자를 통한 거래는 하지 않고 대리점 직원을 동반하여 TV국, 스폰서에게 직접 논의하고 영업하여, 서로의 투명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제작자가 직접 협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형태로 밀어붙여, 완성된 작품에 대해 스폰서가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44][92]. 코무로가 가장 신경 쓴 것은 게재량이었고, “나에게 주는 돈이 있다면, 그만큼 스팟 CM의 편수를 늘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TV CM에 제공한 음악의 저작권 사용료는 전혀 받지 않았다[93].
1996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스캔들 보도가 과열되어, 여러 레코드 회사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창작 활동, 여러 영업 창구가 발생한 CM 등의 타이업 활동, 언론 대책 등, 코무로와 마루야마가 대응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어, 업무량의 방대함과 대처의 번잡함으로 인해, 안티노스 매니지먼트 독자적인 A&R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된다.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매니지먼트 업무를 에이벡스 자회사인 프라임 디렉션(현: 에이벡스 라이브 크리에이티브)이 신설한 “TK룸”으로 이관. 음악 업계 이외의 연예계에도 정통한 융통성 있는 직원들이 모여, 마츠우라를 리더로 하는 팀 체제의 새로운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시작되었고[94], 동시기에 제작, 생활 거점을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95].
이 시점에서, “타이업이 결정되지 않으면 곡을 쓰지 않는다”고 공언할 정도[33]의 타이업이 전제된 프로듀싱 수법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증가했다. 코무로는 “먼저 스폰서에게 마음에 들어야, 처음으로 제 곡이 되는 겁니다”[96] “프로 뮤지션은 팔리는 것으로, 겨우 자신의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좋아하는 음악보다, 팔리는 음악을 우선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68]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대중 음악’의 근간에 관여한다. ‘대중에게 너무 영합한다’거나, ‘팔리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지만, 이것은 대중 음악인데”[93]라고 단정적인 의견을 말했다.
미스터 칠드런 등의 프로듀서로 알려진 고바야시 다케시와 이니셜이 같다는 이유로 “TK 시대”, “더블 TK”, “테츠타케 밀리언 시대”라고 불렸다[97][98]. 코무로는 “일하는 방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똑같습니다. 다만 고바야시 씨는 남성 보컬 록 밴드 계열을 프로듀싱한다. 저는 여성 보컬 댄스 일렉트로닉 계열을 프로듀싱하고, 정반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자극한 덕분에, 서로 밀리언 히트가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97].
1996년 4월 15일에는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프로듀싱 곡이 톱 5를 독점했다[85]. 1996년은 globe의 앨범 「globe」가 당시 오리콘 기록을 갱신하여, 역대 1위가 되는 판매량 400만 장 이상을 기록. 아무로 나미에의 앨범도 330만 장을 넘고, 카하라 토모미의 앨범도 250만 장을 넘는 등, 이 해에만 프로듀싱 곡의 총 판매량은 1,500만 장 이상을 기록했다[99]. 더욱이 1996년부터 2년 연속으로 고액 납세자 순위에서 전국 4위를 기록, 1997년의 납세액은 11억 7000만 엔으로 추정 소득은 약 23억 엔이었다[99]. 1996년 말에는 해외 진출을 노리고 루퍼트 머독과 손을 잡고, 100만 달러를 출자하여 홍콩에 합작회사 TK NEWS(후의 Rojam Entertainment)를 설립했다[99].
1997년, 스피드 2의 테마곡 리믹스를 담당하는 등 세계적인 전개를 했다[99]. 8월에 매니지먼트 업무를 프라임 디렉션에서 안티노스 매니지먼트로 되돌리고, 활동 거점을 아시아로 정했다. “인터넷을 활용한 타사와의 원활한 스튜디오 작업 거래, 근황 보고”, “아시아 시장의 새로운 개척과 미국으로의 진출”, “미국의 사운드를 아시아에 가져와, ‘미국의 사운드와 비교해서 아시아의 사운드는 어떤가?’라는 리서치를 반복함으로써, 아시아 사운드의 수준 유지, 향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95][100][101]가, 후에 “기술 혁신의 속도를 잘못 읽어버려, 일본, 유럽, 미국, 홍콩 등, 국가별로 데이터 전송 속도와 통신 환경 등에 격차가 너무 커서, 어긋남이 발생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브랜드와 성적을 요구받고 있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어, 현지 리스너와 싱어와 밀착하여 함께 음악의 질을 키워나가는 활동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102][103]고 말하고 있다.
1997년 상반기까지는 밀리언셀러를 연발했지만, 이 무렵부터 기존의 콤로 패밀리(小室ファミリー)를 위한 곡의 분위기가 팝적인 요소에서 일렉트로닉으로 변화하고 있는 점(특히 아무로 나미에의 곡이 두드러짐), 같은 해 여름 콤로와 에이벡스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어 글로브가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한 것, 그리고 이듬해 1998년에는 TRF·히토미 등의 프로듀싱이 없어지면서, 콤로 붐 전성기의 중심에 있던 아무로 나미에는 출산으로 인해 휴업했고,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카하라 토모미도 연애 관계 정리로 인한 이탈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콤로 패밀리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같은 시기에 새로운 음악성을 가진 J-POP 아티스트(미시아처럼 본격적인 R&B 가수로 등장한 아티스트, 글레이·L'Arc~en~Ciel처럼 밴드 붐을 이끈 아티스트, 스피드처럼 젊은층의 아이돌 붐을 이끈 아티스트, 에이벡스 내에서 콤로 파벌에서 벗어나 세력을 키운 에브리 리틀 띵 등)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콤로 붐은 서서히 쇠퇴해갔다. 에이벡스와 절연 후에는 TM NETWORK 시절의 구 소속사인 소니와 전속 프로듀서 계약을 맺고, 매니지먼트도 위탁했다. 게다가 수십억 엔을 보수(인세)의 선급금으로 받았다.
1998년에는 토코·스즈키 아미·미라이 레카를 프로듀싱했지만, 1996년 전후의 콤로 붐 전성기에 비해 기세는 떨어졌다.
이듬해 1999년 이후는 명확한 후렴구를 가진 곡 전개를 그만두고, 글로브나 TRUE KiSS DESTiNATiON 등을 통해 콤로 본인이 차세대 댄스 음악으로 주목하고 있던 트랜스 등을 일본 J-POP에 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더욱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아티스트(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 츤쿠의 프로듀싱으로 인기를 얻은 모닝구무스메, 시이나 링고 등)의 CD가 히트 차트의 중심이 되면서, 콤로 프로듀스의 CD 판매량은 감소했고, 그 이후로는 글로브 관련 활동이 거의 콤로의 활동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비주얼계[주석 38]·츤쿠[주석 39]·우타다[주석 40]의 등장에는 은퇴를 의식할 정도의 충격을 받아,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프로듀서가 되어야 한다", "만들고 싶을 때 만들고, 건반을 치고 싶을 때 건반을 칠 수 있는 작곡가로 돌아가고 싶다"라며 자신의 위치에 고민했다[108].
이 무렵이 되자 "팔리지 않아도 좋다", "팔리는 게 더 좋지만, 이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가를 중시하고 있다"[109], "오자와 세이지 씨의 작품의 대히트를 보고, 메가 히트에 의존하지 않는 셀렉트숍 같은 음악을 목표로 하고 싶었다"[110]라고 심경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콤로의 매니저를 맡았던 마루야마 시게오도 "권한을 너무 많이 준 것이 큰 실수였다. 콤로 씨와 아티스트에게는 음악 제작, 곡 선택, 노래에 전념하게 해야 했는데, 아티스트 선정, TV CM·드라마·영화 등 출연처 매니지먼트까지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그 범위까지 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할까' 고민하면 멈춰 버린다. 영상 부문 전문 매니저를 따로 준비해야 했다"라며 후회하는 코멘트를 남겼다[111].
2001년 1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의 전속 프로듀서 계약을 해지하고, 선급금 중 미소진액이었던 18억 엔을 반환했다. 배경에는 당시 콤로 프로듀스의 돈벌이 주역이었던 스즈키 아미가 연예 활동을 중단하게 된 것이 있다. 같은 달, 수많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아무로 나미에가 『think of me/no more tears』를 마지막으로 콤로 패밀리에서 독립했다. 5월에 ASAMI와 재혼했다.
5월 홍콩의 벤처 주식 시장 "GEM"에 Rojam이 상장하고 콤로는 70억 엔 이상을 투자하여 최대 주주가 되었지만, 이로 인해 현금 보유액이 없어졌다. 게다가 2주 후에는 공개 가격의 반값을 밑돌았고, 2002년 결산은 12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같은 시기에 factoryorumok을 청산한 후, 매니지먼트 계약을 안티노스 매니지먼트에서 요시모토흥업으로 옮겼다. 겸하여 연예인으로도 활동했고, 같은 해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웃는 개의 모험"의 콩트에 '초 핸섬 사무라이'로 출연하는 등 화제가 되었지만, 프로듀스 업무는 호전되지 않았다[99]. 9월, 소니에 대한 상환에 시달리는 한편 현금 보유액이 없어진 콤로는 후지은행으로부터 일본 은행으로서는 처음으로 본인 소유의 저작권을 담보로 10억 엔의 융자를 받았다[112]. 게다가 전년인 2000년 12월에는 에이벡스로부터도 글로브의 활동 재개를 조건으로 인세의 선급금으로 10억 엔을 받았던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융자금은 앞서 언급한 전속 프로듀서 계약 해지에 따른 선급금 반환에 충당된 것이 후일 5억 엔 사기 사건의 공판에서 밝혀졌다. 이 때문에 소니에 대한 부채는 완납할 수 있었지만, 이후로는 에이벡스와 후지은행에 대한 상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2002년 3월 ASAMI와 불과 10개월 만에 속도위반 이혼(실자 있음). 5월 요시모토흥업이 설립한 아르 앤드 시 재팬(현: 요시모토 뮤직)의 주식 70% 이상을 Rojam이 인수하여 요시모토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리고 11월 22일 KEIKO와 재혼[113]했다. TBS에서 결혼 피로연이 특별 프로그램으로 생중계된 것은 화제가 되었다[99]. 하지만 ASAMI와 합의한 약 7억 엔의 위자료를 일괄 지불할 수 없어 분할로 지불하게 되었지만, 그 지불도 자금난으로 인해 2004년 8월경에는 체납되기 시작했다[99][114].
이 무렵부터 소유하고 있던 별장, 주권, 럭셔리카, 크루저 등의 자산 매각을 시작했다[99]. 2004년 Rojam Entertainment의 모든 주식을 5억 엔에 매각하고 투자·경영에서 철수했지만, 약 70억 엔의 주식 평가 손실이 발생했다[115][99]. 같은 해 말까지 에이벡스로부터의 선급금은 3억 1000만 엔밖에 소진되지 않았고, 게다가 2005년 9월에는 오이타 트리니타에 대한 스폰서 비용 7000만 엔을 체납하고 있는 것도 밝혀졌다[114].
2007년 기시모토와 계약이 종료되고, 사기 조직을 중심으로 새롭게 설립된 이뮤직과 계약했다. 이때 부부가 타나베 아키토모를 찾아가 "무엇이든 하겠으니 TV에 출연시켜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2008년 11월 1일 NACK5 개국 20주년 방송에 출연했을 때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며 "98년부터 10년은 곡이 잘 나오지 않았다"[116]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 같아 욕심을 낼 수 없었다"[117]고 말했다.
2006년 8월 6일, 코무로는 일본음악저작권협회에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된 모든 곡 806곡의 저작권을 10억 엔에 양도하는 임시 계약을 간사이 지방 거주 개인 투자자 남성과 체결했다. 전처 아사미가 저작권 사용료를 압류하고 있다며, 그 해제 비용으로 5억 엔을 선불로 요구하여 8월 29일까지 5억 엔을 받았다[118].
하지만 실제로는 임시 계약 단계에서 이미 저작권의 일부는 에이벡스 엔터테인먼트·버닝 퍼블리셔스·라이징 퍼블리셔스와 같은 음악 출판사에 양도(음악 업계에서는 저작자인 작곡가나 작사가가 음악 회사에 저작권을 양도하고 관리를 맡기는 대신 인세를 받는 것이 관례다[118])되어 있었고, 코무로에게는 저작권이 없었다[118]. 그러나 코무로는 환불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은 2008년 2월 코무로를 상대로 손실 이익을 포함한 6억 엔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여 소송을 제기했다[118]. 코무로가 전액을 지불함으로써 합의가 성립되었지만, 기일이었던 9월 말까지 코무로는 지불하지 않았다[118].
이 때문에 남성은 지방검찰청에 형사 고소했다[118]. 검찰은 코무로가 받은 5억 엔을 압류 해제가 아닌 빚 상환에 사용한 것을 파악했다. 처음부터 돈을 가로챌 목적이었다고 판단하여, 2008년 11월 4일 오전 7시 40분경 오사카 지검 특수부는 코무로와 트라이벌 킥스 사장, 광고 회사의 실질 경영자 등 3명을 5억 엔 사기 혐의로 체포했다[119]. 전날 오사카 지검 특수부로부터 자진 출두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신오사카역 앞 시티 호텔에 머물고 있었고, 체포 당시 미노 몬타의 아사즈밧! 등 일부 아침 정보 프로그램이 특별 편성되어 체포 혐의 설명과 호텔 상공의 항공 촬영 영상을 곁들여 호텔 입구부터 연행되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11월 21일에 기소되었고, 같은 날 보석금 3,000만 엔을 지불하고 보석되었다[120]. 보석금은 레코드 회사 에이벡스와 아내 KEIKO가 지불했다[121].
2009년 1월 21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3월 12일에 2차 공판이 열렸다. 2차 공판 직전인 3월 10일, 합의금을 포함하여 6억 5,000만 엔을 에이벡스 그룹 대표 마쓰우라 마사토가 사비로 대납하고 피해자에게 전액을 지불했다. 피해자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지만 수령을 거부당했다[122]. 이 피해자에게 보낼 예정이었던 사과문은 3차 공판에서 코무로 자신에 의해 낭독되었다[122]. 피해자 측과의 합의 협상에서 정황 증인으로 출석한 마쓰우라는 "합의를 제안했지만 '안 된다, 성의가 부족하다'고 변호사로부터 들었다. '성의가 부족하다는 게 무슨 뜻인가'라고 대리인에게 물었더니 '돈이다'라고 들어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지만[123], 피해 남성은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며 "민사 재판에서 합의가 성립되어 결착이 났다."고 말했다[124]. SNS의 믹시에서는 2008년 11월부터 "코무로 테츠야 씨의 부활을 기원하는 모임"이라는 커뮤니티가 457명을 모으는 등, 믹시의 지원을 받아 종이 서명 활동도 진행되었다. (서명 TV에서도 진행되었다.) 또한 코무로의 어머니와 매니저, 변호사의 동의를 얻은 상황에서 서명 활동과 병행하여 법원 제출도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코무로에게 편지를 쓰는 "코무로 테츠야 씨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활동도 진행되는 등, 복귀를 바라는 여론이 일었고,[주석 41] 코무로의 감형을 바라는 움직임은 음악 업계와 음악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있었고, 실제로 감형 탄원서를 제출한 음악 업계 관계자도 있었다[125]. 3차 공판은 4월 23일에 열려 결심되었다.
2009년 5월 11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고, 변호 측과 검찰 측 모두 항소하지 않고, 같은 해 5월 25일 0시를 기해 형이 확정되었다.
2010년 5월 복귀작으로 AAA의 곡 "만나고 싶은 이유/Dream After Dream ~꿈에서 깨어난 꿈~"을 프로듀스했다. 또한 이듬해 6월에는 모리 신이치에게 제공한 곡이 발매될 것이라고 매스미디어와 5월 2일자 코무로의 트위터에서 밝혀졌다[126]. 「잠들지 않는 러브송/이정표」의 곡 제공이 결정되어 작곡 외에 작사, 편곡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레코드 회사를 불문하고 초신성, SMAP, 키타노 키이, 하마사키 아유미 등에게 곡을 제공하고 있다. 코무로는 80년대 아이돌에게 많은 곡을 제공했던 시절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2010년 9월 29일에는 글로브의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었고, 미발표곡이나 패키지에 따라서는 미공개 영상과 코무로의 사인도 제공되었다. 또한 11월에는 야시키 타카진에게 곡 "그때의 하늘"을 제공했다.
2011년 6월 13일, 우카와 나오히로가 주최하는 음악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DOMMUNE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을 진행했다. 순간 최대 시청자 수는 2만 7천 명을 넘었고, 총 시청자 수는 14만 4천 명을 기록했다. 12월 23일, 라포레 뮤지엄 하라주쿠에서 개최된 “HARAJUKU PERFORMANCE + DOMMUNE” 4일차에 출연하여 토미타 이사오와 토크 및 라이브를 진행했다[127].
2012년 3월 20일,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동일본 대진재 복구 지원 자선 콘서트 ‘ALL THAT LOVE-give&give-’에 TM NETWORK로 참가하면서 약 4년 만에 TM NETWORK 활동을 재개했고, 일본무도관 콘서트, 신곡 “I am” 발매, 2013년에는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공연을 개최했다.
TM NETWORK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2014년에는 투어와 음반 발매, TV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봄에는 약 6년 만의 전국 투어 ‘TM NETWORK 30th 1984〜 the beginning of the end’가 시작되었다. 과거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앨범 ‘DRESS2’와 신곡 ‘LOUD’도 투어 시작 전에 발매되었다. 같은 해 10월 29일에는 7년 만의 오리지널 앨범 ‘QUIT30’을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 8위에 올랐다. 동시에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TM NETWORK 30th 1984〜 QUIT30’ 투어도 시작되었다.
2015년 2월에는 아레나 공연 ‘TM NETWORK 30th 1984〜 QUIT30 HUGE DATA’, 3월에는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단발 콘서트 ‘TM NETWORK 30th FINAL’을 개최하여 2012년부터 이어온 연극적인 라이브에 마침표를 찍었고, 2012년부터 이어온 TM NETWORK 활동도 충전 기간에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128].
이후 사카모토 미우와의 콘서트, globe 20주년 기념, 다양한 음악 제공 및 각종 이벤트 출연, 솔로 앨범 발매, 와키다 레이와의 인스톨레이션 제작, 방송 프로그램 진행, 아사쿠라 다이스케와의 유닛 PANDORA 결성 등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2018년 1월 19일, 전날 발매된 ‘주간문춘’의 보도를 받고 기자회견을 열어 음악 활동 은퇴를 선언했다[129]. 코무로 테츠야는 회견에서 여성과의 불륜 관계를 부인하고, 아내 간호 중 자신의 정신적 피로를 언급하며, C형 간염과 왼쪽 귀의 돌발성 난청 등 질병으로 왼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는 등 신체적 능력 저하로 인해 자신의 창작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고 밝혔다[130][131]. 이후 이혼 조정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132].
2019년부터 피아노와 신시사이저를 활용하여 제작한 공간 음악을 건축·예술 관련 기업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제공하는 일을 시작하며 음악가로서의 제작 활동을 재개했다[133][134].
2020년, 아키모토 야스시와 관계자들의 격려와 제안으로 노기자카46의 “Route 246” 작곡 및 편곡에 참여하며 2년 3개월 만에 공개적으로 음악을 제공했고[134], 스트리밍은 1주일 만에 300만 회 재생을 돌파했다[135]. 부모가하마 야외 콘서트, TM NETWORK로서의 라디오 출연 및 3인 무대 등 활동을 재개했고, 이듬해 2월 26일 KEIKO와의 이혼이 성립되었다[136].
2021년, D4DJ Lynx Eyes(Raychell&우메무라 히나코)에게 신곡 ‘#ALL_FRIENDS’를 제공했고[137], 본인은 NFT 작품을 공개 녹음하여 론칭했으며[138], fanicon에서 팬 커뮤니티 “TETSUYA KOMURO STUDIO”를 개설하고[139] 앨범 “JAZZY TOKEN”을 바이닐로 한정 발매하고, 빌보드 원맨 라이브를 개최했으며[140], TM NETWORK는 6년 만의 재가동 무관객 라이브 작품 “How Do You Crash It?”을 3회에 걸쳐 배포했다[141].
2022년 3월 1일자로 국립연구개발법인 “이화학연구소”의 객원 주관 연구원에 취임했다. 임기는 2025년도까지다[142]. 이화학연구소 소속 연구자들과 함께 “인공지능을 이용한 작곡 지원 시스템 개발”, “‘코무로 테츠야를 분석한 인공지능’과 ‘코무로 테츠야 자신’에 의한 공동 작품”[143], “AI만으로 곡을 만들 수 있게 된 경우, 저작권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가지고 ‘코무로 테츠야다운 세계관’이 확립되는가, AI를 이용한 검증”[144] 등에 대해 연구한다. 일반적으로 박사 학위 취득자가 대상이지만, 음악가가 객원 주관 연구원에 취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코무로 테츠야가 신시사이저 개발과 음악 배포에 일찍이 참여하는 등 혁신적인 음악 제작을 선구적으로 실현해 온 것이 평가되어 취임하게 되었다[145].
2022년 8월 30일자로 THE WHY HOW DO COMPANY 주식회사(대표이사 타나베 카츠미)의 집행 임원에 취임했다[146]. 이후 2022년 12월 1일자로 동사의 이사에 취임했으나[147], 2023년 7월 31일자로 동사의 이사직을 사임했다[148]. 그 사이, 동사로부터 2억 9234만 엔의 빚을 지고 있었다[149]는 사실이 FLASH (사진 주간지)에서 보도되었다[150].
2022년 12월 31일에 열린 제73회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시노하라 료코의 노래 피아노 연주자로 예고 없이 등장했다[151].
※주최를 맡은 라이브 등도 포함. 게스트 출연 등은 생략.
※텔레비전・라디오 항목에서는 레귤러 출연했던 것만 기재.
1996년 4월 15일자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코무로 테츠야가 작사·작곡·프로듀스한 곡이 1위부터 5위까지를 독점했다. 동일 작곡가이자 프로듀서가 상위 5곡을 독점한 것은 일본은 물론 세계 음악 차트에서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95년도 JASRAC 발표 저작권 사용료 배분액 랭킹(JASRAC상)에서는 코무로 테츠야가 작사·작곡한 곡이 국내 작품 1위부터 3위까지를 독점했다. 동일 작곡가가 상위 3곡을 독점한 것은 동 랭킹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98년 10월 19일자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코무로가 리더를 맡은 globe의 곡 4곡이 동시에 베스트 10에 진입, 당시 사상 최초의 기록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발매일이 다른 재발매가 아닌 동일 아티스트의 복수 차트 인"으로 현재도 기록이 유지되고 있다.
순위 | 판매량 (단위: 만 장) |
작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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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6,828 | 아쿠 유 |
2 | 4,984 | 마츠모토 타카시 |
3 | 4,576 | 아키모토 야스시 |
4 | 4,219 | 코무로 테츠야 |
5 | 3,718 | 이나바 코시 |
6 | 3,570 | 구와타 게이스케 |
7 | 3,467 | 츤쿠 |
8 | 2,850 | 사쿠라이 카즈토시 |
9 | 2,596 | 나카니시 레이 |
10 | 2,473 | 야마가미 미치오 |
아래는 일부에 불과하다. 자세한 내용은 코무로 테츠야 제공곡 일람을 참조.
1994년, 코무로 테츠야는 trf의 「survival dAnce 〜no no cry more〜」로 처음으로 100만 장 이상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1997년 카하라 토모미의 「Hate tell a lie」까지 20곡의 밀리언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코무로 붐 참조).
코무로 테츠야가 지금까지 프로듀스한 싱글 및 앨범 총 판매량은 약 1억 7천만 장에 달합니다. 또한, 일본 작곡가별 싱글 총 판매량은 츠츠미 쿄헤이에 이어 2위[85], 작사가별 싱글 총 판매량은 4위입니다[288].
※ 아래는 주요 코무로 테츠야 프로듀스 작품이며, 일부에 불과합니다. ☆ … 밀리언 ☆☆ … 더블 밀리언
전 쇼비가쿠엔 대학 예술 정보 학부 교수[주석 49]
국제 마약 통제 위원회(UNODC) 친선 대사[178]
간염 대책 대사
도쿄 다마 진흥 특명 무사시 고후추 대사[189]
부모는 후쿠시마현 출신. 후쿠시마현 나카지마촌 촌장을 역임한 코무로 야스히코는 먼 친척이다.[주석 50] 자신의 Twitter에서 사쿠마 쇼잔과 시바타 가쓰이에의 피를 잇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289]
애칭은 「테츠짱」「선생님」「TK」등. 키 167cm, 체중 57kg. 혈액형 O형. 왼팔 아랫부분에 문신이 두 개 있다. 1990년대에 TK 로고를, 2000년대에 그 위에 다른 마크를 새겼다.[290]
와세다 지쿠교 고등학교 상업과 졸업 후, 와세다 대학 사회과학부에 진학·재학하지만 제적되었으나, 현재는 추천 동문이다. 2001년 와세다 지쿠교 고등학교 개교 백주년 기념으로 백주년 기념가 「와세다 빛나리」를 작곡(작사는 오쿠시마 타카야스). 모교인 와세다 지쿠교에는 「코무로 테츠야 기념 홀」이 있다. 나이와 직업이 다른 사람들과 이업종 교류를 하는 모임인 「이능회」를 주최하여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291]
자타 공인 「화내지 않는 성격」이며[292], 아가와 사와코는 「담담한 화법, 상냥하고, 허리가 낮고, 친근한 분위기」[293], 쿠보 코지는 「주먹다짐은 물론, 고함치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투덜거리는 정도는 있지만, 온화한 사람이다」[294], 이와사 토시히데는 「자신의 부주의로 중요한 데이터를 지워버렸는데도, 「어쩔 수 없지」라는 가벼운 한마디로 넘겨버리는 성격은 따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295]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타 공인 「워커홀릭」이며[16], 1년 중 8할을 TV, 콘서트, CM 등의 미디어 출연이 없는 한, 스웨트 차림으로 스튜디오를 겸한 자택에서 하루 종일 보내고[296][297][298], 특히 연말연시를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으로 여기고 있다.[299] 코무로는 「스튜디오가 좋다. 「멜로디가 만들어지고, 이런 어레인지로 완성되어, 이런 확장 방식으로 팔리고, 이런 콘서트가 있고」라고 꿈을 부풀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300]
절세 대책을 위해 1998년 거점을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 말리부로 옮겼기 때문에[301], 1996년부터 2년 연속 전국 4위를 기록했던 고액 납세자 순위에서 빠졌다. 하지만, 나중에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려워져 일본으로 거점을 옮겼다. 코무로 붐 이후, 자신의 비정상적인 금전 감각에 대해 언급되는 일이 많았고, 특히 체포 당시 자주 보도되었다.[302][303][304][305][306]
음악 활동의 작풍에 대해, 2018년 은퇴 후 주간지의 직격 질문에 「자신은 최첨단의 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곡에 대한 평론으로 「코무로스럽네」라고 말해지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고 말했지만[307], 2021년 12월 활동 복귀 후 TOKYO FM 「Blue Ocean」출연 당시에는 「전에는 이미 질렸어, 좋아, 라고 생각되고 있는 건가 하고 느껴왔지만, 그것은 코무로 테츠야스럽네라고 말해지는 것은 중요한 일, 좋은 일, 특징이 있다는 것~다 해봤지만~작곡가로 누구누구스럽네라고 말해지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어렵다. 모두 다양한 곡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추구해 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308]
※굵은 글씨는 2011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스튜디오입니다.